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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시편 107-108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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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6월 15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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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107-108편 연구

5. 제5권(107~150편)
 

107편: 구속받은 자는 이렇게 말할지어다

하나님의 백성의 삶 가운데는 다음 두 가지 어휘 군(群)으로 정리 될 수 있는 일반적인 행동방식이 있다. 죄(Sin) 혹은 거역(Rebellion) 종살이(Servitude) 징벌(Retribution) 간구(Supplication) 회개(Repentance) 구원(Salvation) 회복(Restoration)
먼저 하나님의 백성은 여호와를 떠나고 그분의 말씀에 불순종하는 삶을 산다. 이어서 그들은 그러한 떠남의 쓰라린 결과를 맛본다. 정신이 들자 그들은 죄를 자복하고 여호와께 부르짖는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그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그들을 축복의 위치로 다시 한번 돌려놓으신다. 탕자의 이야기처럼 그 사실을 친근하고 적절하고 또 생생하게 들려주는 이야기는 없을 것이다. 이 되풀이되는 흐름에는 두 가지 기본 요소가 나타나 있다. 하나는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떠나기를 원하는 인간 본성의 고질적인 성향이고, 하나는 회개하고 돌이키는 그분의 백성을 회복시키시는 여호와의 다함없는 자비이다. 여기 107편에는 여호와의 자비하신 구원이 네 가지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의 구원(4~9절).

옥에 갇힌 자들의 구원(10~16절).

중병에 걸린 자들의 회복(17~22절).

광풍을 만난 선원들의 구원(23~32절).

서론(107:1~3)

107:1~3 그러나 먼저 주제를 알리는 서론이 나온다. 그것은 여호와께 감사하라는 촉구이다. 두 가지 이유가 제시되었는데, 여호와는 선하시다는 것과 그분의 인자하심은 영원하다는 것이다. 그 둘 다 쉬지 않고 감사드릴 충분한 이유가 되고도 남을 것이다. 이제 특별한 부류의 사람들이 그분의 인자와 사랑을 받은 특별한 자들로, 다시 말해서 그분이 핍박과 종살이와 압제와 환란에서 구속 하시고 전 세계적인 분산에서 그 땅으로 돌아오게 하신 자들로 택함 받았다. 물론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우리는 본문을 이스라엘 민족에게만 국한시키지 않아야 한다. 우리 역시 죄의 노예시장에서 구속된 자들이며, 여호와께 구속받은 자들로서 우리도 감사의 대열에 참여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광야에서 방황하는 자들의 구원(107:4~9)

107:4~9 이 첫 번째 묘사는 이스라엘이 그 두렵고 황량한 광야에서 보낸 40년 간의 여정을 비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백성들은 길을 잃고 굶주리고 목이 말랐다. 그들은 낙심과 절망에 빠졌다. 그 때 그들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 그 즉시 그들의 방황이 끝났다. 여호와께서 지름길로 그들을 인도하사 모압 평지에 이르게 하셨다. 그 곳은 가나안에 들어가기 위한 발판과 같은 곳이었다. 그리고 거기서 그들은 마침내 안식할 수 있는 한 성을 발견했다. 그들은(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분의 끝없는 사랑과 자기 백성에게 베푸시는 기이한 돌보심으로 인해 얼마나 여호와께 감사해야 하는지! 그 약속의 땅에서 그분은 목마른 자들을 만족케 하시고 주린 자들에게 가장 좋은 양식을 허락하신다.

옥에 갇힌 자의 해방(107:10~16)

107:10~12 이스라엘 역사에 관한 두 번째 묘사는 바벨론 포로에 대한 것이다. 시편 기자는 그 70년의 기간을 투옥상황에 비유했다. 바벨론은 어둡고 침침한 구덩이 같았다. 이스라엘 백성은 노예로 복역하도록 종신형을 선고받은 사슬에 매인 죄수와 같았다(물론 바벨론에서의 상황은 애굽에 있었을 때처럼 가혹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포로로 끌려간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고된 노역에 지쳐 쓰러졌으며, 아무도 곁에 오지 않았다.

107:13~16

그러나 그들이 여호와께 부르짖자 여호와께서 흑암의 땅에서 그들을 구원하고 포로의 사슬을 끊으셨다. 이제 그들이 해야 할 유일한 합당한 일은 그분의 변치 않는 사랑과 그들을 위해 이루신 모든 기이한 일로 인해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이다. “저가 놋문을 깨뜨리시며 쇠 빗장을 꺾으셨음이로다.” 시편 기자가 본 단락에서 바벨론 포로를 언급하고 있다고 우리가 믿는 까닭은 이 구절 때문이다. 이와 관련 있는 표현이 이사야 45:2 에 발견되는데, 여호와께서는 거기서 포로생활을 종결시키는 모습을 묘사하기 위해 본 절과 거의 같은 표현을 사용하셨다. 고레스에게 말씀하시면서 그분은 이렇게 표현하셨다. “내가 네 앞서 가서 험한 곳을 평탄케 하며 놋문을 쳐서 부수며 쇠 빗장을 꺾고.” 문맥으로 보아 그분은 바벨론 포로의 종결을 말씀하고 계심이 분명하다.

중한 병에 걸린 자들의 회복(107:17~22)

107:17~20 이 셋째 단락은 그리스도의 초림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의 상황을 가리키는 듯하다. 이스라엘은 그때 병들어 있었다. 그들은 마카비 시대의 시련기를 막 벗어났다. 어떤 이들은 미련하게도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당했다. 그들은 이미 식욕을 잃었고 속히 사망의 문에 이르고 있었다. 이스라엘의 경건한 잔존자 들은 기도하며 이스라엘의 소망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님이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쳐주셨다. 여기서 말하는 그분의 말씀은 치유의 사역으로 이스라엘 집에 이르신 살아있는 말씀(the Logos)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듯하다. 우리는 복음서의 기록에서 “그가 병든 자를 다 고쳐주셨다”는 기록을 얼마나 자주 대하는지. 마태는 구주께서 병든 자들을 고쳐주심으로 선지자 이사야가 말한 것을 성취하셨다고 상기시켜 준다.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 8:17). 만일 모든 이스라엘 백성이 다 고침 받지는 않았다고 누군가 이의를 제기한다면, 우리는 그 모두가 약속의 땅에 들어가지 않았으며 그 모두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107:21~22

다시 한번 시편 기자는 사람들에게 그분의 선하심과 기이한 행사로 인해 여호와를 찬양하라고 촉구한다. 그 아들을 선물로 주신 일이야말로 감사제를 드리고 노래로 그 행사를 선포할 특별 한 이유이다.

 

광풍을 만난 선원들의 구원(107:23~32)

107:23~27 마지막 묘사는 매우 생동적이다. 그것은 대양을 왕래하는 배에서 일하는 선원들에 관한 것이다. 그들은 바다에서 폭풍을 만날 때마다 여호와의 능력에 대해 알게 되었다. 먼저 바람이 크게 거세어진다. 이어서 파도가 엄청난 물결을 이룬다. 배가 파도 위로 치솟다가 아래로 곤두박질한다. 파도 위에서 흔들거리다 파도 밑으로 빨려 들어간다. 거대한 배가 펄펄 끓는 가마솥의 성냥갑 마냥 요동친다. 그와 같은 폭풍 속에서는 어떤 용감무쌍한 선원도 낙담한다.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맡은 임무를 수행하느라 술 취한 자처럼 비틀거리며 우왕좌왕하는 것뿐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력함을 절감하며 목숨이 경각간에 달려있음을 직감한다.

107:28~30

신을 부정하며 저주하던 선원들이 이러한 때 기도하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인자하셔서 그러한 절박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신다. 그분이 폭풍을 잠잠케 하시니 파도가 고요해진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사람들은 다시 항해하여 얼마 후에 바라던 항구에 진입한다.

107:31~32

구원받은 선원들은 그분의 변치 않는 인자하심과 놀라운 기도응답으로 인해 여호와께 감사하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그 들은 그분의 신실한 백성들과 함께 그분을 높이고 장로들의 회(會)에서 그분을 찬양함으로써 그들의 서원을 갚아야 한다. 이것이 이스라엘의 마지막 폭풍과 그 뒤에 이어질 평화의 나라에 들어감을 묘사한다고 말하면 너무 문제를 비약시키는 것일까? 폭풍은 대환란을 가리킨다. 바다는 쉬지않고 요동하는 이방 민족들을 가리킨다. 선원은 야곱의 환란 동안 다른 민족들에게 괴롭힘 당할 이스라엘 민족을 가리킨다. 이스라엘의 믿는 잔존자가 여호와께 호소한다. 그 때 여호와께서 친히 개입하사 평화와 번영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지상에 재림하신다.

하나님의 통치와 은혜(107:33~43)

107:33~34

이 시의 남은 부분은 그분의 백성이 불순종할 때와 순종할 때 하나님이 각각 어떻게 반응하시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분은 큰 권능으로 강을 말리우고 샘을 증발시키신다. 백성들이 그분에게 등을 돌릴 때 옥토를 변하여 소금밭이 되게 하는 일은 그분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다.

107:35~38

그러나 그분은 그 반대로도 일하실 수 있다. 평강의 왕께서 천년왕국을 다스리기 위해 다시 오실 때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다. 광야지역에 물이 풍부한 못이 여기저기 생겨날 것이다. 사하라 사막과 모제브 사막이 물이 가득한 동산이 될 것이다. 오랜 세기 동안 사람이 거하지 않던 곳에 주거시설이 들어설 것이다. 온 땅에 도시들이 세워질 것이다. 광야가 경작지로 돌변할 것이다. 곡식과 채소와 과일이 풍성히 결실할 것이다. 그분의 축복으로 말미 암아 곳곳마다 곡물이 넘칠 것이며, 가축은 질병을 모를 것이다.

107:39~43

한편 그분이 악한 통치자들을 다루시는 모습은 정반대로 묘사된다. “다시 압박과 곤란과 우환을 인하여 저희로 감소하여 비굴하게 하시는도다. 여호와께서는 방백들에게 능욕을 부으시고 길 없는 황야에서 유리케 하시나”(39,40절). 이것이 바로와 헤롯과 히틀러의 운명이었으며, 환란 때에 사단의 삼위(마귀, 짐승, 거짓 선지자-역주)가 겪을 종말이 될 것이다. 그러나 궁핍한 자는 곤란에서 높이 드시고 큰 가족으로 그들을 축복하신다. 정직한 자들은 그것을 보고 심히 기뻐하나, 악인은 그것을 보고 할 말을 잃어버린다(악인이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드문 일이다). 지혜 있는 자는 사람들과 민족들의 운명을 배후에서 결정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볼 것이며, 역사와 현재의 사건들을 통해 교훈을 얻을 것이다. 특히 그들은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에 대한 그 분의 섭리 속에서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깨닫게 될 것이다.

 

108편: 속히 도우소서!

이 시가 친숙하게 여겨지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1~5절은 시편 57:7~11과 거의 같고, 6~13절은 시편 60:5~12과 거의 일치한다. 이 시는 찬양으로 시작해서 기도와 약속과 문제와 다시 기도로 이어지다가 밝은 전망으로 마감한다.

찬양(108:1~5)

108:1~2 시편 기자는 그분의 변치 않는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인해 여호와를 찬양하겠다고 굳게 결심했다. 그는 지극히 높으신 분께 노래하며 찬양할 마음과 열의가 있다. 아직 어두운 시간에 그는 그의 영혼을 깨우고, 조용히 쉬고 있는 비파와 수금을 깨워 감사의 노래로 새벽을 맞도록 한다. 찬양으로 하루를 시작한다는 것은 얼마나 합당한 생각인지!

108:3 그는 그의 노래를 집안이나 가까운 이웃에 한정하려 하지 않는다. 그가 가는 곳마다 만민이 그가 여호와를 경배하는 소리를 들을 것이며, 열방이 그의 찬미소리를 들을 것이다. 이러한 결심은 또한 우리의 결심이 되어야 한다.

108:4~5 왜 다윗은 그렇게 여호와에 대해 열심히 있었는가? 그것은, 그분의 인자하심은 하늘 위에 광대하고 그분의 진실은 궁창에 미치기 때문이다. 그분에 대한 찬송은 그분의 위대하심에 걸맞아야 한다. 즉, 그분은 하늘 위에 높이 들리시며 그 영광이 온 세계 위에 높이 되셔야 마땅하다. 다윗의 놀라운 경배의 노래를 듣노라면 다음과 같이 표현한 어떤 이의 심경을 보다 깊이 이해하게 된다. “찬양은 기도보다 더 신령하다(divine). 기도는 하늘에 이르는 축복된 길을 가리키지만 찬양은 이미 하늘에 있다.”

기도(108:6)

108:6 이제 그는 간구로 나아간다. 나라가 적군의 공격을 받고 있었고 전망이 어두웠다. 이스라엘이 그토록 종종 경험한 초자연적인 도움의 손길이 이상하게도 보이지 않았다. 이에 그는, 침략자들을 물리칠 도움을 보내사 그분의 사랑하는 백성을 구원해달라고 여호와께 탄원했다.

약속(108:7~9)

108:7~8 그 성소에 요동치 않고 엄위한 중에 계시는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이방 열국에 대한 자신의 주권적인 권리를 주장하셨다. 그분은 메시야의 지배가, 야곱의 우물이 위치한 세겜 지방과, 야곱이 가축을 위한 장막을 지은 숙곳 골짜기와(창 33:17), 목초지와 약 제용 향유로 유명한 길르앗 고원과, 요단 양편에 위치한 므낫세를 포함할 것이라고 약속하셨다. 에브라임은 지파들을 이끌어 그 지경을 보호하는 그분의 머리의 보호자가 될 것이다. 유다는 창세기 49: 10의 약속대로 그분의 홀, 즉 통치권좌가 될 것이다.

108:9 역시 그 왕국에 포함될 외국 영토의 대표자로 모압, 에돔, 블레셋 등 세 이방 나라가 언급되었다. 모압은 그분의 목욕통이 될 것인데, 그것은 멸시와 지배를 표현하는 상징물이다. 에돔에게는 그 분의 신을 던지실 것인데, 신은 소유권과 예속과 조롱을 암시한다. 모압과 에돔은 속국(屬國)이 될 것이나 블레셋은 멸망할 것이다. “블레셋 위에서 내가 외치리라.”

108:10~11 에돔에 대한 승리의 약속은 다윗으로 그 성취를 보고픈 간절한 마음을 갖게 했다. 에돔의 수도인 셀라(‘페트라’로도 알려졌음)는 접근불가능하고 난공불락한 성으로 잘 알려졌다. 그는 누군가가 자기를 이끌어 에돔에 이르게 하여 그것에 대한 승리를 외치 게 해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문제가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그 얼굴을 숨기신 것이다. 그분의 도움이 보이지 않았고 불행한 결과가 야기되었다. 이스라엘의 군대가 전쟁에 나아갔으나 여호와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지 않은 까닭에 패배하고 말았다.

기도(108:12)

108:12 여호와 없이는 상황이 절망적이며 그분 외에 아무도 도울 수 없다. 다윗은 오랜 인생 경험을 통해서 사람의 도움은 무익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전장(戰場)에서 도움을 베푸셔서 다시금 이스라엘의 일을 돌아봐 달라고 능력의 하나님께 간구했다.

전망(108:13)

108:13 기도의 자리를 떠나자마자 시편 기자는 승리의 찬가를 부른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고 용감히 행하리니….” 그분이 대적을 물리치고 사랑하는 백성에게 승리를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폴 게르하르트가 그토록 생동력 있게 표현한, 믿음에서 난 확신이다. “하나님이 나를 위하시니 나 두려움 없네. 모두가 나를 대적하여 일어나도 두려움 없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