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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시편 103-104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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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6월 11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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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3-104편 연구

103편 : 여호와를 송축하라

103:1

우리가 시편을 사랑하는 한가지 이유는 마음으로는 느끼지만 입으로는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것을 아름답게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 103편만큼 그런 사실을 실감케 하는 대목도 없을 것이다. 이 장려한 찬양시에서 우리는 우리 마음의 깊은 감사를 반영하는 표현들을 대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 영혼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호소하게 되는데, 이 때 우리의 ‘영혼’이란 인간의 비물질적인 부분만이 아닌 인간의 전 존재를 통틀어 가리킨다. 영과 혼과 몸이 여호와의 성호를 송축하는데 함께 드려지는 것이다.

103:2

그분의 모든 은택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의미심장한 권면과 함께 다시 한번 송축하라는 호소가 울려 퍼진다. 이런 호소가 필요한 것은 우리가 너무도 종종 쉬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건강한 몸과 건강한 마음, 시력, 청력, 언어, 식욕 등등 많은 축복들에 감사하기를 쉬 잊는다. 우리는 그것들을 아주 당연시하는 경향이 있다.

103:3

그러나 그 모든 것에 우선하여 우리는 우리의 모든 죄악을 용서해 주신데 대해 그분께 감사해야 한다. 주홍 같은 죄가 눈보다 더 희게 된다는 것은 말할 수 없는 하나님의 은혜의 기적이다. 어떤 이는 그 묘비에 “죄사함 받았다”는 말만 남기게 했는데, 우리는 그의 마음에 공감할 수 있다. 또 어떤 아일랜드 성도는 “주 예수님이 내 모든 죄를 사해주셨네. 더 이상 기억하지 않으시네”라고 고백했는데, 이 또한 우리가 공감하는 바다.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보혈로 영원히 사해졌다는 것을 안다는 것은 참으로 헤아릴 수 없이 큰 축복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기억해야 할 두 번째 은택은 우리의 모든 질병이 고침 받았다는 것이다. 이 사실이 제기하는 문제점을 다루기 전에 먼저 기억해야 할 것은 병고침이 죄사함 뒤에 온다는 점이다. 육체적인 것은 영적인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모든 질병이 다 죄의 결과는 아니지만 어떤 질병은 그 결과이다. 그 둘이 연관이 있을 경우엔 죄 사함이 반드시 병 고침 앞에 와야 한다. 그러나 그렇다 하더라도 여전히 본문에는 문제점이 있다. 본 절은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라고 말한다. 그러나 실제 경험에 있어서는 모든 질병이 다 치유되는 것은 아니며, 또 주님께서 더디 오시면 우리 모두는 조만간 죽는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렇다면 본 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일까? 그 답을 구하면서 우리는 다음 사실 들을 살펴보게 된다. 첫째로, 모든 참된 치유는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만일 당신이 질병에 걸렸다가 회복되었다면 당신은 하나님이 모든 치유의 근원이 시기에 치유 받은데 대해 하나님께 감사 드릴 수 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하나님의 이름 중 하나는 ‘여호와 로피’(Jehovah Rophi), 즉 ‘여호와는 네 치료자’이다. 참된 치유의 모든 사례는 하나님께로서 온다. 둘째로, 하나님은 모든 종류의 질병을 고칠 수 있으시다. 그분에게는 고칠 수 없는 질병이란 것이 없다. 셋째로, 하나님은 장기간에 걸쳐 자연적인 수단을 사용하여 치료하실 수도 있고 기적적으로, 즉각적으로 고치실 수도 있다. 그분의 치유능력에는 어떤 한계도 없다. 넷째로, 주님은 지상에 계실 때에 실제로 그분께 나아오는 모든 병자를 고쳐주셨다(마 8:16). 다섯째로, 천년왕국 동안 그분은 자신을 거스르는 자들의 경우를 제외하고(사 65:20) 모든 질병을 실제로 고쳐주실 것이다(사 33:24; 렘 30:17). 그러나, 본 절이 이밖에 무엇을 의미하든 간에, 신자가 모든 질병에 대해 치유를 주장할 수 있다는 의미일리는 없다. 왜냐하면 이 시의 다른 구절에서 우리는 인생의 짧음과 확실히 그 종말이 온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15,16절). 필자가 믿기에는 본 절은, 신자가 병 고침을 받는 것은 하나님이 베푸시는 자비의 결과이며, 하나님은 치료자로 인정과 감사를 받으셔야 마땅하다는 의미이다.

103:4

하나님은 질병을 고쳐주실 뿐 아니라 우리의 삶을 구덩이 혹은 파멸에서 구속하신다. 물론 이것은 그분이 지옥의 권세에서 우리를 건져내신 것에 적용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그보다는, 하나님이 위험과 사고와 비극에서 우리를 항상 건져 내사 무덤에 내려가지 않게 하신다는 의미로 여겨진다. 우리는 하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우리가 얼마나 자주 우리 하나님의 개입에 의해 일찍 죽는데서 보호받았는지를 깨닫게 될 것이다. 네 번째 은택은 하나님이 인자와 긍휼로 우리를 관 씌우시는 것이다. 그것은 전에 사랑 받지 못한 자요 범죄자들에게 주어지는 놀라운 영광이다. 우리는 영원한 사랑으로 사랑을 받고 날마다 그분의 긍휼을 부음 받는다.

103:5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가 사는 동안 좋은 것으로 우리를 만족케 하신다. 이 표현은 원문상 뜻이 다소 불분명하다. 문자 그대로 옮기면 그분이 “좋은 것으로 네 장식을 만족케 하신다”이다. ‘네 장식’은 ‘네 전성기’, ‘네 세월’, ‘네가 사는 날 동안’ 등으로 옮겨진다. 그러나 그 정확한 뜻에 의견이 일치되지 않더라도, 여기서 말하는 의미는, 여호와께서 마음의 소원을 만족케 하시며, 정직히 행하는 자들에게 모든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신다는 것이다. 이들 다섯 가지 은택(죄사함, 병고침, 보존, 장식, 만족)의 결과는 우리의 청춘이 독수리같이 새로워진다는 것이다. 질병과 폭력은 육체에는 영향을 미치지만 영혼에는 영향을 미칠 수 없다. “…겉 사람은 후패하나 우리의 속은 날로 새롭도다”(고후 4:16). 이 땅에서는 우리 몸에 관한한 영원한 청춘이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영혼은 점점 더 높은 데로 올라갈 수 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사 40:31). 독수리는 장수와 힘으로 명성이 높다. 독수리의 생명은 계속해서 힘을 유지하고 젊음이 새로워지는 그런 생명이 아니다. 독수리 역시 노쇠하여 죽는다. 그러나 하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지속적인 소생함을 누리며, 독수리가 점점 높은 데로 치솟듯이 점점 힘을 더 낸다고 시편 기자는 말하고 있다.

103:6

여호와의 자비와 인자는 특히 출애굽 사건에서 히브리 백성을 다루시는 그분의 섭리 가운데 나타나 있다. 그 사건은 압박 받는 모든 자를 위해 의로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의 모습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103:7~8

애굽에서 약속의 땅으로 가는 여정에서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 행위를, 이스라엘 백성에게 그 행사를 알리셨다. 그분은 모세를 비밀한 사귐 가운데로 이끌어 들이시고 그에게 그분의 계획과 목적을 알리셨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러한 계획이 실제로 이뤄지는 것을 목도했다. ‘그 행위’(ways)와 ‘그 행사’(acts)의 차이는, ‘그 행위’는 계시에 의해 알려지는데 비해 ‘그 행사’는 눈으로 볼 수 있는 대상이라는 점이다. 그분의 백성에 대한 모든 섭리 속에서 여호와께서는 자신을 자비롭고 은혜로우신 분으로 나타내셨다. 그분은 인도하시고, 보호하시고, 그리고 모든 단계에 필요한 것을 예비해 주신다. 그분의 백성은 완고하고, 불평이 많고, 거역하고, 또 순종치 않지만, 그분은 그 분노를 발하기 전에 오래 참으신다. 그분의 자비는 저들의 배은망덕한 반응에도 불구하고 한결같다. “사랑하는 주님, 저는 당신께 얼마나 무가치한 존재인지요. 그러나 당신은 늘 저에게 놀라운 사랑을 베푸십니다. 저는 종종 방황하고 당신의 뜻을 행하는데 실패하지만 당신의 은혜로운 사랑이 늘 저의 곁에 머뭅니다.” (저자 미상).

103:9~10

여호와께서 그 자녀를 징벌하셔야 하는 때도 있지만 그 때에도 그분의 징계는 무한히 계속되지 않는다. 심판은 그분으로서는 낯선 사역이다. 그분의 자비가 심판을 이기고 즐거워한다. 만일 우리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는다면 영원히 지옥에 있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가 나타나 우리로 당연히 받아 야 할 징벌을 내리지 않게 하신다.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이 갈보리 십자가에서 다른 사람에 의해 지불되었다. 우리가 구주를 믿을 때 하나님은 공의롭게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다. 값을 두 번 치르는 일이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께서 단번에 영원히 값을 지불하셨으며, 이에 우리는 결코 그 값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103:11~12

그 놀라운 구원 계획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은 가히 측량할 수 없다. 그것은 인간의 상상을 초월한다. 만일 우리가 땅에서 하늘까지 거리를 잴 수 있을진대 그분의 사랑의 광대함을 약간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가능하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우주의 크기도 측량할 수 없다. 그리고 무한한 거리에 대해 얘기하자면, 그분은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실로 멀리 옮기셨다. “동은 동, 서는 서, 그 둘은 결코 만날 수 없듯이” 신자와 그의 죄는 결코 만나지 않는 것이다. 그 죄는 사랑의 기적에 의해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제거되었다.

103:13~14

 “인간의 연약함이 하나님의 동정을 불러일으킨다” 고 어떤 이는 말한 바 있다. 어린 자식이 어른 만한 짐을 지고 힘들어하는 것을 아버지가 사랑의 눈길로 바라보듯이, 여호와께서 연약 함 중에 있는 우리를 동정의 눈길로 굽어보신다. 그분은 우리가 어떤 자인지를 아신다. 우리가 진토에서 지은 바 된 나약하고 무력한 자임을 아신다. 우리는 너무도 종종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우리가 진토라는 사실을 잊는다. 그것은 교만과 자기 신뢰와 이탈(independence)과 그리고 파탄을 초래한다.

103:15~16

인간은 진토일 뿐 아니라 곧 진토로 돌아간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지라”는 첫 인간에게 주어진 선포는 냉엄하게 성취되어왔다. 인간은 어느 한 날 태어나서 들의 꽃처럼 사라지고 옛 친구들도 다시는 보지 못한다. 

103:17~18

그러나 하나님의 자비는 그와 대조된다. 그것은 그 분을 경외하는 자들에게 영원에서 영원까지 지속된다. 그리고 그분의 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미친다. 이 사실에는 큰 위로가 있다.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종종 그들의 자녀와 손주들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자라나는 것을 보고 염려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랑이 무한하고 그 의가 우리에게만 아니라 우리의 다음 세대에게도 충분한 분에게 우리의 어린 자녀를 안전히 의탁할 수 있다. 무론 이러한 약속들은 반드시 조건이 붙어 있다. 그 약속들은 그분의 언약을 지키고 그분의 계명을 기억하고 준행하는 자들에게 유효하다. 그러나 그것은 지킬 만한 합리적인 약속들이다.

103:19~22

여호와는 왕이시다. 그분의 보좌는 하늘에 있다. 그리고 그분의 권위는 우주적이다. 그러한 분으로서 여호와는 마땅히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들의 찬양의 대상이 되셔야 한다. 그러기에 다윗은 우주의 단(檀)에 올라 만물로 이뤄진 대 찬양대를 지휘하여 놀라운 경배의 합창을 이끌어낸다. 먼저 그는 능력이 뛰어나고 순종적인 천사들에게 찬양을 시작하도록 지시한다. 그런 다음 여호와 를 섬기는 모든 피조물에게 찬양의 하모니를 불어넣으라고 호소한다. 이어서 그는 하나님의 모든 작품들에게 영광스런 절정에 합류 하도록 신호를 보낸다. 그리고 이 놀라운 할렐루야 합창이 하나님이 다스리는 온 우주에 울려 퍼지는 동안 지휘자 자신이 여호와를 송축하라는 자신의 목소리를 더한다. 

104편 : 창조주요 관리자(Sustainer)되신 하나님

뉴욕이나 런던이나 동경처럼 수백만의 인구로 북적거리는 도시에 꼭 있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보라. 다양한 기관들이 상수도, 주택, 식량, 기타 필수품을 공급하는 일들을 떠맡는다. 그러나 우리가 사는 세상을 관리하는 하나님의 업무는 얼마나 더 복잡하겠는지 생각해 보라. 모든 피조물에게 물을 공급하는 문제며, 사람과 짐승과 새와 물고기에게 식량을 공급하는 방대한 량의 업무며, 집과 거처를 제공하는 문제며, 등등을 생각할 때 우리는 참으로 하나님은 창조주요 이 광활한 자연세계의 관리자로서 놀라운 일을 하고 계심을 깨닫게 된다.

104:1~3

자기 영혼(전 존재)에게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호소한 후에 익명의 시편 기자는 미켈란젤로에게 영감을 불어넣었을 것이 분명한 하나님에 관한 놀라운 묘사 중 한 대목을 표현한다. 이것은 비유적인 표현으로 이해해야 하는데, 그런 방법이 아니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달리 묘사하거나 그분의 무한한 위대성을 유한한 언어로 포착할 길이 없는 것이다. 시편 기자는 서서, 응시하고, 놀라, “여호와 나의 하나님이여, 주는 심히 광대하시나이다!”라고 외친다. 이어서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세부 묘사를 시도한다. 하나님은 형언할 수 없는 광채와 위엄으로 옷 입으셨다. 그분은 옷을 입음같이 빛을 입으셨는데, 이는 그분의 절대적인 순결성과 의로움을 말해준다.

104:4

 “영으로 자기 천사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 히브리어는 ‘바람’과 ‘영’을 같은 단어를 사용하고, 그 옆 단어는 ‘천사’와 ‘사자’를 의미하므로, 본문은 이렇게 옮겨질 수 있다. “바람으로 자기 사자를 삼으시며 화염으로 자기 사역자를 삼으시며”(우리말 성경은 이렇게 옮겨져 있음-역주). 이것이 자연계의 모습에 잘 어울리는 번역이나, 히브리서 1:7에 인용된 본문은 전통적인 번역을 요구한다. (헬라어의 경우에도 그 단어들이 두 가지  의미가 있으므로 신구약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104:5~9

이 시를 두루 살펴보면 창세기 1장의 창조의 날들이 재현되는 듯한 느낌을 받게 된다. 물론 어떤 날들은 그다지 분명하게 언급되지 않지만 말이다. 시편 기자는 그분의 피조물, 특히 인간을 위한 하나님의 섭리적인 배려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먼저 그는 하나님이 보이지 않은 기초 위에 땅을 빚으사 인간이 거할만한 안정되고 견고한 지면이 되게 하신 일을 회상했다. 처음에는 산이 잠길 만큼 온 땅이 물로 깊이 덮여 있었다. 제3일에 하나님이 “천하의 물이 한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고 말씀하셨다 (창 1:9). 이에 즉시 물이 뒤로 물러갔다. 산과 계곡이 하나님이 미리 정해놓으신 곳에 나타났다. 바다와 대양이 육지를 넘어가지 못하도록 분명한 경계선 안에 형성되었다.

104:10~13

이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순환체계가 작동하기 시작했다. 샘들이 물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시내가 앞을 다투어 흘러내려 계곡과 평지와 그리고 마침내 바다에 이르렀다. 이후로 들짐승들은 그 시내와 강과 호수에서 갈증을 해소해왔다. 그리고 그 물줄기 곁에서 자라는 수목에서 새들이 보금자리를 찾아왔다. 또 다른 물 공급원은 비이다. 엘리후가 말한대로, 하나님이 “물을 가늘게 이끌어 올리신즉 그것이 안개 되어 비를 이루고 그것이 공중에서 내려 사람 위에 쏟아졌다”(욥 36:27,28). 그리고 그렇게 거대한 스프링클러 시스템이 산을 적시자 온 땅이 하나님의 관개(灌漑)사업의 결과로 만족했다.

104:14~15

다음은 물자를 공급하는 일이다. 그분은 가축이 먹을 풍성하고 다양한 식물과, 사람이 자신과 생축의 꼴을 위해 경작할 곡물을 주셨다. 느리고 조용한 기적에 의해 땅에서 식물이 나온다. 포도열매의 즙이 놀라운 화학작용에 의해 포도주로 변하고 사람은 그것을 마시고 즐거워한다. 감람나무는 건강과 식생활에 널리 사용되는 훌륭한 기름을 낸다. 그리고 곡식에서 사람에게 노동할 힘을 공급하는 생명의 양식이 나온다.

104:16~18

산림의 큰 나무들은 땅 밑에서 엄청난 양의 물을 빨아올린다. 그리하여 레바논의 백향목들은 사람이 가꾸지 않아도 자연적으로 자란다. 그것은 새들에게 보금자리를 제공해준다. 가령 학은 잣나무(곱향나무 혹은 상록 침엽수일 수도 있다)에 둥지를 튼다. 높은 산들은 산양에게 이상적인 거처를 제공하며, 바위는 너구리의 피난처가 되어준다.

104:19~23

세상은 순환체계로, 일정한 계획에 맞춰 돌아가므로 시간을 측정하는 방법이 있음이 분명하다. 즉, 하나님은 달을 제 위치에 두어 달(the months)을 정하게 하셨으며, 해는 마치 의식이 있듯이 질 때와, 하루가 끝났음을 알리는 때를 안다. 낮과 밤이 규칙적으로 바뀌는 것은 동물과 사람을 위한 섭리적인 현상이다. 어두움이 깔리면 삼림의 짐승들이 먹이를 찾아 으르렁거리며 다닌다. 아침이 밝아오면 그들은 안전한 굴속으로 몸을 숨긴다. 그러나 사람은 일터로 나아와 낮 시간을 생산적인 활동에 사용한다.

104:24~26

하나님의 행사의 다양함은 놀랄만하다. “어떤 지혜 가 그 모든 것을 생각해냈는지”(Knox). 땅은 그분의 피조물로 가득하고, 그분은 놀라운 주의력을 가지고 그 모든 것들을 세세히 돌보신다. 바다는 작은 미생물에서 큰 고래에 이르는 크고 작은 생물들로 가득하다. 26절에 ‘선척’을 언급한 것은 생물들을 논하는 문맥에 맞지 않아 보인다. 어떤 이는 그것을 바다 짐승(창 1:21)으로 이해하나, 선척이 옳은 번역이다. 같은 구절의 ‘악어’(leviathan)는 바다를 이상적인 놀이터로 삼는 고래 내지 돌고래를 가리킬 수도 있다. (그러나 욥기 41편의 주해와 각주를 보라).

104:27~30

비록 그것을 의식하지 못할지 모르나 모든 생물체는 그 식물을 하나님께 의존한다. 그분이 식물을 주시면 그들이 그것을 취한다. 그분이 손을 펴시면 그들이 풍성히 채움을 입는다. 13절에서, 땅은 비를 내리시는 하나님의 행사의 결과로 만족한다. 16절에서 나무들은 수액(樹液)이 가득하다. 그리고 이제 모든 피조물이 만족해 한다.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한가지 피할 수 없는 사실은 죽음이 한 세대를 넘어뜨리고 새로운 세대가 그 자리를 채우기 위해 일어난다는 것이다. 사고를 당해서든 노쇠해서든 짐승이 죽는 것은 하나님이 그 얼굴을 가리우신 것과도 같다. 그러나 짐승들이 죽어 흙으로 돌아가는 그 때에 하나님은 자신의 영을 보내사 새로운 창조와 같은 모습으로 땅을 다시 채우신다. 한편으론 끊임없는 사라짐이 일어나고 한편으론 끊임없는 지면의 새로워짐이 일어난다.

104:31~32

이 시는 최초의 창조로 시작했듯이, 이제 죄의 잔악성이 진압되고 주님께서 그 위대하심과 선하심으로 인해 존귀와 영광을 받으실 그 황금시대를 바라는 뜨거운 기도로 마감된다. “시편 기자는 그 모든 것이 회복되고 그 자신과 하나님의 모든 피조물이 연합하여 놀라운 조화를 이루는 모습을 보기를 고대한다. 새로운 창조의 안식일이 밝아오면 하나님은 그 피조물 안에서 안식을 누리고 피조물은 그분 안에서 안식을 누릴 것이며, 온 우주는 찬양의 향연으로 충만한 성전이 될 것이다.” 여호와에 대해서는, 그분의 영광이 영원히 지속되고 그분은 자기 행사로 인해 즐거워하시기를 시편 기자는 기도했다. 그분은 한번 바라봄으로 지진을 일으키고 한번 만짐으로 대폭발을 일으키시는 참으로 위대한 하나님이시다. 

104:33~35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사는 동안 그의 하나님의 놀라움을 찬양하겠다고 시편 기자는 결심했다. 그는 자신의 묵상이 자신이 참 기쁨을 발견한 여호와께 향기로운 것이 될 수 있기를 기도했다. 하나님의 창조를 손상시키는 죄인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땅에서 소멸되는 것을 도덕적으로 합당하게 여겼다. 그렇게 되리라고 이미 하나님이 선언하셨으며, 이에 그의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부합한 것이다. 우리 자신에 대해서 말하자면, 그의 마지막 송영에 확실히 동참할 수 있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