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공부 시편119-120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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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6월 23일 2021년본문
시편119-120편 연구
119편: 성경에 관한 모든 것
이 시는 성경의 황금 알파벳으로 불려왔다. 그 이유는, 각각 동일한 히브리어 알파벳 문자로 된, 22개 단락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각 단락은 8구절로 되어 있고, 각 단락의 모든 구절은 같은 히브리어 문자로 시작된다. 즉, 원문상에는 첫째 단락의 모든 구절은 알렙 (Aleph)으로 시작되고, 둘째 단락의 모든 구절은 벳(Beth)으로 시작되고, 등등으로 전개되어 있다. NKJV에 의하면, 이 가장 긴 시의 네 구절을 제외한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명칭 내지 묘사를 담고 있다. 그 네 예외구절 은 84,121,122,132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이름들은 율법, 증거, 도, 법도, 율례, 계명, 규례, 말씀, 약속, 판단, 성실하심, 강령, 의, 명령 등이다. 알파벳을 이렇게 글자 수수께끼식으로 사용함으로써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성과 완전성을 진술하는데 가능한 모든 인간언어가 총동원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리도우트는 지적했다. 신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암시를 볼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신다(계 1:8). 알파와 오메가는 물론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문자이다. 그 말씀은 그분이 모든 알파벳 문자를 결합해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선하고 완전한 것이 되신다는 뜻이다. 이 시의 어느 두 구절도 똑같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각 구절마다 조금씩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이 119편에 대해서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는 18편 같은 갑작스런 감정의 분출이 아니며 또 그런 모습도 취하지 않는다. 이 시는 대상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또한 여유를 갖고 숙련된 손질을 가하기를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인해, 조용히, 오랜 시간을 들여, 한 땀 한 땀 이어져 만들어지는 수예품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 시의 여러 단락에 붙여진 다음 소제목들은 주로 F. W. 그랜트의 주해를 참조한 것이다.
1~8절 말씀 순종의 축복
9~16절 말씀을 통한 정결
17~24절 말씀을 통한 분별력
25~32절 말씀을 통한 자기 부족 인식
33~40절 말씀의 능력
41~48절 말씀을 통한 승리
49~56절 말씀을 통한 안식과 위로
57~64절 말씀 안에서 오래 참음
65~72절 형통한 때와 곤란한 때의 말씀의 무한한 가치
73~80절 말씀을 통한 통찰력
81~88절 말씀에 의해 힘을 얻는 고난당하는 자
89~96절 말씀의 영원성
97~104절 말씀을 통한 지혜
105~112절 범사에 등불과 빛이 되는 말씀
113~120절 악인과 말씀
121~128절 말씀을 통한 분리와 구원
129~136절 말씀을 통한 기쁨과 사귐
137~144절 말씀에 대한 열정
145~152절 말씀을 통한 경험
153~160절 말씀을 통한 구원
161~168절 말씀의 완전성
169~176절 말씀을 통한 기도와 찬양
가장 높은 차원의 의미로 볼 때, 이 시는 우리 구주께서 이 지상에 서 인간으로서 경험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준다. 또한 “그 충만한 예언적인 의미에서 (이 시는) 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그분의 오랫동안 무시당한 말씀으로 돌이킬 때 고백할 표현이 될 것이다”라고 벨렛은 지적했다.
119:1복 있는 혹은 행복한 자는 그 삶이 여호와의 말씀과 일치되는 자이다. 비록 그가 죄를 범하고 실패하더라도 말씀 안에는 자백하고 돌이킬 수 있는 대책이 있으며 그것이 그를 완전한(흠이 없는) 상태에 머물게 한다.
119:2중요한 것은 그분의 증거에 대한 순종, 다시 말해서, 마지 못해하고, 주저주저하고, 발이 질질 끌리는 그런 순종이 아니라, 전심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깊고도 넘치는 열망이다!
119:3 행복은, 소극적으로는 모든 형태의 죄악으로부터 분리되는 데서 발견되며, 적극적으로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성경에 그려 놓으신 길을 쫒아가는 것이다. 악을 멀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선을 행하는데 완전히 몰입되는 것이다.
119:4 하나님의 법도는 선택이 아니라 명령이며, 마음 내키는 데로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근실히 지켜야 할 것이다.
119:5 시편 기자는 이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에서 그 자신의 삶에 적용되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교훈에서 기도로 서서히 전환하면서 그는, 꾸준히 순종하고자 하는 바램과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119:6여호와의 모든 율례를 지키는 한 그는 마음을 괴롭히고, 뺨을 붉게 만들고, 때로는 몸마저 움츠러들게 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119:7“기도에서 찬양으로 나아가는 것은 멀거나 어려운 여행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에 순종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기쁨이 충만하며, 그로 인해 자발적인 경배에 이르게 된다.
119:8굳은 결심은 겸손한 순종과 짝을 이룬다. 시편 기자는 열심히 주의 율례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다.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기자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119:9모든 청년의 삶 가운데 가장 중대한 문제 중 하나는 어떻게 순결을 지키느냐는 것이다. 그 답은 성경말씀에 실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119:10 거룩의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 편의 간절한 추구와(“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하나님 편의 능력 부여(“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가 있다.
119:11그분은 우리의 의지를 거스르거나 우리의 협력이 없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렇게 지혜롭게 말했다. “성경에서 최고의 책은 성경이다. 성경을 두는 최고의 장소는 마음 속이다. 성경을 그곳에 둬야하는 최고의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데서 구원해주기 때문이다.
119:12 하나님은 심히 위대하고 심히 은혜로우시기에, 새롭게 된 성품은 그분의 율례를 배우고 그 가르침대로 빚어지기를 소원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
119:13 말씀의 보화를 심히 즐거워하는 마음은 반드시 그것을 다른이들에게 전하고픈 소원에 이르게 한다. 우리가 진정 뭔가를 믿을 때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삶의 법칙이다.
119:14 성경의 숨은 보배를 찾는 자는 금덩어리를 찾고 기뻐하는 것처럼 기뻐한다.
119:15 하나님의 말씀은 극히 만족스런 묵상을 위한 무한한 재료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을 준행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 결단과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
119:16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나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고, 그것을 항상 기억하고 준행하고자 결심한다.
119:17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나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나 그분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필요가 큼으로 그분께 풍성한 은혜를 구하도록 하자.
119:18 성경은 겉으로 보아서는 잘 보이지 않는 기이한 영적인 보배가 풍부하다. 우리의 눈은 그것을 보기 위해 열릴 필요가 있다.
119:19 성경은 나그네를 목적지까지 정확히 안내해주는 지도다.
119:20 성경에 대한 갈증이 심하고 또 늘 유지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시편 기자의 영혼은 말씀에 대한 사모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러한 뜨겁고 강렬한 마음을 늘 간직했다.
119:21 역사는 교만하고 방자한 자들이 어떻게 주의 계명을 거절하고, 곧 하나님의 능한 손에 의해 멸망당했는지에 대한 사례로 가득하다.
119:22 신자는 세상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한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벧전 4;4). 그러나 성실함은 보상을 받을 것이며, 그분의 “잘하였도다”는 칭찬이 훼방과 멸시를 넉넉히 보상해줄 것이다.
119:23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핍박할 때에도 그리스도인은 “욕을 받되 대신 욕하지 않고” 성경을 묵상함으로 힘과 위로를 발견할 수 있다.
119:24 메튜 헨리는 이렇게 말한다. “방백들이 비방할 때 다윗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는가? 하나님의 율례가 그의 조언자였으며, 그것이 그에게 오래 참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조언해주었다.”
119:25 인생은 정상이 있는가 하면 골짜기도 있다. 우리는 슬픔 중에 가라앉을 때에도 말씀의 회복력으로 소생시켜 달라고 여호와께 구할 수 있다.
119:26 우리가 우리 행위를 고할 때, 즉 우리 죄를 자백할 때, 여호와께서는 용서로 답하신다. 그것은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라는 기도로 표현된, 거룩에 대한 새로워진 열망을 갖게 한다.
119:27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의 의미와 그것을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사에 대한 묵상을 가져올 것이다.
119:28 우리의 영혼이 눈물에 잠기는 삶의 어두운 순간에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를 굽어 살피사, 종종한 구절의 말씀으로 우리를 일으키사 계속 나아가도록 힘을 주신다.
119:29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진리와 거짓을 구분 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형태의 거짓에 대한 거룩한 증오심을 심어 준다. 또한 성경은, 진리란 하나님이 어떤 사물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요 17:17).
119:30 아무도 스스로 거룩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성실한 길(the way of truth)을 의도적으로 택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맞춰야 할 표적이요 쫒아야 할 본이요 걸어야 할 길로 우리 앞에 제시되어야 한다”고 스펄젼은 말했다.
119:31 시편 기자는 접착제로 붙듯이 하나님의 증거를 붙들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방황하기 쉬운 성향을 깨닫고, 여호와의 도우심을 적극 호소한다.
119:32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머리가 아닌 큰 마음을 주실때 그때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신속히 지키게 된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이다.
119:33우리는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학교의 학생으로서 우리는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는 법을 열심히 배우고, 그분의 말씀을 생애가 마치는 날까지 준행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119:34 우리는 깨달음을 구해야 한다. 성경에 대해, 그 의미와 요구조항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분을 전심으로 쫒을 수 있겠는가?
119:35 우리는 안내를 구해야 한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이 원하시는 길로 우리의 발걸음을 안내해주시기를 원한다. 그 길이 우리가 참으로 기뻐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119:36 우리는 물질적인 부요 보다는 영적인 부요를 구해야 한다.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어떤 사람에게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가고 그 대신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준다는 것은 은혜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119:37 우리는 그림자가 아닌 하나님의 실제를 구해야 한다. 여기에 TV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이 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TV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묘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을 사실 그대로 다루고 있다.
119:38 우리는 주의 약속을 세우시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주의 은혜의 모든 강물을 내가 주장하며, 모든 약속에 내 이름을 기록하네.” 그분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주장은 우리가 그분을 경외한다는 사실에 달려있다.
119:39 우리는 훼방에서, 즉 주 예수님의 이름에 수치나 불명예를 끼칠 만한 일체의 것에서 떠나기를 구해야 한다. 그분의 규례는 선하며, 우리는 그것을 신실히 쫒아야 한다.
119:40 우리는 개인적인 부흥을 구해야 한다.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사 35:7). 우리가 그분의 법도를 간절히 사모할 때 그분은 그분의 의로 우리를 소성케 하실 것이다.
119:41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처음 구원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긍휼과 보호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돌아보고 지키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주장해야 한다.
119:42 여호와의 기도응답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는 불신자 들의 훼방을 침묵시키는데 기여한다. 우리의 믿음은 결코 실패할리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다.
119:43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규례를 바란다면, 그분은 그분을 위해 증거할 기회를 계속해서 허락하실 것이다.
119:44 그분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살아있는 동안 그분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것이다. “그분이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일을 생각할 때 어찌 내가 내 최선을 드리고 온전히 그분을 위해 사는 것 외에 무엇을 달리 생각하리요?”
119:45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자유케된 자들은 진정 자유하다 (요 8:36).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속박된 체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분의 법도를 구하는 자들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다.
119:46 믿음은 열 왕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담력을 준다. 얼마나 많은 군주들이 겸손하고, 종종 멸시당하던 신복들에게서 복음 을 들었는지!
119:47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 안에서 깊은 개인적인 기쁨을 얻는다. 성경은 기쁨의 샘이요 즐거움의 강이요 결코 마르지 않는 만족의 근원이다.
119:48 우리는 그 범위와 그 깊이와 그 능력과 그 보화와 그리고 그 무한함에 놀라 서있다는 의미에서 성경을 경외한다. 우리는 그 내용과 그 끼친 영향력으로 인해 성경을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을 밤낮 묵상한다.
119:49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잊을리 만무하지만, 그러나 고난의 풀무에서 믿음이 다 바닥이 날 때 우리는 “주여, 기억하소서” 라고 기도를 올릴 수 있다. “그분이 자신의 이름을 의지하라고 가르치고는 이렇게 우리로 수치를 당하게 놔두실리 없어.”
119:50 말씀의 소성케 하는 능력을 체험한 자들은 말씀이 위로의 확실한 근원임을 알게 된다. 슬기로운 자의 말은 종종 공허하고 무익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살아있고, 적절하고, 또 효과적이다.
119:51 만일 우리가 여호와께 신실하다면 우리가 마땅히 받을 비방과 조롱의 몫을 받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인 원리를 발견했을 때는 그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119:52 우리는 과거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어떻게 개입하셨는지를 기억함으로써 격려를 받는다. 우리를 이제까지 인도하신 그 동일한 자비가 남은 길도 확실히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의 과거의 사랑은 우리로 그분이 마침내 우리를 어두움에 빠지게 내버려둘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119:53 하나님의 율법이 욕을 당하고 거부당하는 것을 볼 때 신자는 격분하게 된다. 주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롬 15:3). 아버지에 대한 어떤 불명예도 아들에게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119:54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으로 인해 나그네는 나그네 된 집에서, 혹은 낙스의 표현대로 “추방자의 땅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길이 거칠어도 멀지 않다. 밤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노래를 주신다.
119:55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잠 못 이루는 밤은 말씀 안에 계시된 주님을 묵상하는 시간으로 바뀔 수 있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그분을 사랑하게 되며, 그분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그 분의 율법을 지키고자 하게 된다.
119:56 순종은 축복이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119:57 우리가 주님 안에서 얼마나 비할 데 없는 보배를 소유하고 있는지 깨달을 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지키기로 서원하게 된다. 그분은 모든 것에 충족하신 분이시다. 그분을 소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리 만치 부요케 되는 것이다.
119:58 그분은 모든 것에 충족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분의 자비의 약속을 주장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9:59 인도(Guidance)는 늘상 일어나는 문제이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솔직히, 우리 자신에게는 그것을 알 만한 지혜가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경에 그려진 길로 우리의 발길을 돌려야 할 것이다.
119:60 오늘날 우리는 즉석음식, 즉석 서비스 등 즉석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의 즉석 순종이야 말로 생각할 만한, 생산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119:61 악인이 무고한 신자를 넘어뜨리려고 꾀할 수 있으나, 그 때문에 신자는 더욱 인도와 보호를 위해 말씀을 기억한다.
119:62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행 16:25). 그들은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해를 당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judgments)에 관해 찬양할 수 있었다.
119:6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의 백성을 사랑한다. 그리고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은 모든 성경애호가를 사랑한다. 그것은 국가와 사회와 인종의 구별을 초월하는 범세계적인 사귐이다.
119:64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은 세상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아니, 세상은 그것으로 충만하다.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은 “주여, 나로 주의 성령으로 가르침 받게 하소서”라는 고백으로 반응한다.
119:65 그분이 말씀대로 나를 선대하신 그 놀라운 행사로 인해 여호와께 감사한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네가 받은 복을 세어 보고 하나씩 열거해보라. 그러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놀라게 될 것이다!”
119:66 우리 모두는 지식만이 아니라 명철(good judgment)도 구해야 한다. 분별력이나 균형감각 없이 지식을 소유할 수도 있다. 말씀과 삶의 훈련을 통해 우리는 좋은 지각을 얻는다.
119:67 하나님의 징계는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히 12:11). 방황으로 인해 치른 대가를 기억할 때 우리는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하는 경각심을 갖게 된다.
119:68 “하나님(God)”과 “선하다”(good)는 영어 단어는 어근이 같은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다. 선하게 되려면 우리는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에게서 배워야 한다.
119:69 경건치 않은 자들이 거짓말로 우리의 평판을 손상시키려 할 때 우리는 신실히, 요동치 않고 성경말씀을 순종함으로써 보호를 얻을 수 있다.
119:70 세속적인 자들로 사치와 쾌락에 탐닉하게 하라. 우리는 육체적인 방종이 아닌 영적인 교훈에서 만족을 발견한다.
119:71 고난은 잠시뿐이지만 고난의 축복은 영원하다. 사람들이 우리를 해치려고 핍박을 꾀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신다.
119:72 성경은 세상에서 우리가 소유한 가장 가치 있는 자원이다. 컴퓨터가 아무리 큰 수를 기록한다 해도 성경의 가치만큼은 기록할 수 없다.
119:73 하나님이 놀라운 솜씨로 우리를 지으셨을진대 그분이 우리의 교사가 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인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그분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철저히 이뤄야 한다.
119:74 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 우리는 영적인 신선함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는 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강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119:75 질병과 고난과 역경은 직접 하나님께로서 오지 않는다. 한편 하나님은 특정한 상황에서 그것들을 허락하사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분의 의로우심과 성실하심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성숙한 증거이다.
119:76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연약한 진토이며, 우리를 붙들어줄 그분의 연민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119:77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은 고된 압박을 당하는 성도에게 생명을 새로이 불어넣는 것과도 같다. 그분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그분이 돕기 위해 곁에 오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119:78 겔리뉴(Gelineau)는 이 구절을 이렇게 옮기고 있다. “거짓으로 나를 해롭게 하는 교만한 자로 수치를 당케 하소서. 나는 주의 법도를 묵상하리이다.” 하나님은 죄가 역사하도록 허락하시며, 시편 기자는 말씀하신대로 행하시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119:79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사랑하는 자들과 사귐을 가지려 하는 것은 영적인 본능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오기를 얼마나 구하고 있는가?
119:80 우리가 주의 율례를 순종하는데 흠이 없기를 원해야 하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시편 기자가 여기서 생각한 한가지는 죄에 빠지는 그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기 위해서이다.
119:81 신자는 고난 당해도 무너지지 않으며, 당황해도 절망하지 않으며, 핍박을 받아도 버림받지 않으며, 넘어져도 멸망하지 않는다 (고후 4:8,9). 본문에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움을 기다리기에 지쳤지만 여전히 소망이 있다.
119:82 비록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고대하며 그 눈이 침침해졌지만 그는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라고 기도 하는 대신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라고 기도한다.
119:83 ‘연기 중의 가죽 병’은 오그라들고 검게 그슬린 상태이다. 그 비유 그대로, 여기 괴로움 중에 있는 신자는 기다림으로 시들고, 마르고, 흉한 모습이지만, 주의 말씀이 있는 한 절망하지 않는다.
119:84 인생은 아주 짧다. 그 짧음에 비해 고난의 날이 너무 긴것 같다. 여호와께서 압제자들을 징벌하실 때이다.
119:85 본 절의 악인들은 불 경건하고 무법하다. 이 두 특성은 함께 나타난다. 그들은 의인과 무고한 자의 멸망을 꾀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거절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119:86 하나님의 말씀만큼 의지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분은 그분의 핍박받는 백성을 구원하기로 약속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 고소자들의 공격을 당할 때 “나를 도우소서!”라는 “황금 기도”를 담대히 사용할 수 있다.
119:87 “만일 우리가 법도를 붙잡는다면 약속에 의해 건짐 받을 것이다”라고 스펄젼은 말했다. 혹 절망의 순간에 이를지라도 순종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도움이 올 것이다. 믿음을 가지라!
119:88 최선의 기도는 강한 내적인 필요로부터 온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주께서 그의 생명을 보존하사 그분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119:89 믿음은 어둠 속으로의 도약(跳躍)이 아니다. 그것은 온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성경)에 기초한다.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선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전혀 모험이 아니다.
119:90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그분의 말씀에만 아니라 그분의 행사에도 나타나 있다. 그것은 모든 세대에 미치며 자연의 질서와 정밀함 속에 나타나 있다.
119:91 천지는 그분의 법에 순종한다. 파종하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 등 모두가 하나님의 종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분의 말씀의 능력에 의해 정해지고 유지된다.
119:92 바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주 훌륭한, 그러나 고난을 많이 겪은 한 성도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신 33:27)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의 한 선언이 없었다면 나는 1천 번은 넘어졌을 것입니다’.”
119:93 성경의 능력을 삶에서 경험한 자들은 그것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요,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다 (벧전 1:23).
119:94 우리는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은 후에도 더럽힘과 손상으로부터 날마다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법도와 우리 자신을 바로 설때 우리는 이러한 현재시제의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119:95 악인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영향력 없는 하찮은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분을 위해 열매를 거두는 한 우리는 반대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증거를 생각할 때 우리는 힘과 위로를 얻는다.
119:96 이 세상의 제아무리 좋은 것도 완전치 못하고 끝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무한하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게 된다.
119:97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들은 분명 그분의 말씀 또한 사랑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기회가 될 때마다 성경을 묵상하는 모습으로 표현될 것이다. 묵상의 순간에 우리는 성경에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놀라움을 발견하게 된다.
119:98 말씀의 지혜로 무장된 겸손한 신자는 그의 대적들이 발끝으로 서서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무릎을 꿇고 볼 수 있다.
119:99 만일 스승이 자신의 위치에 스스로 만족하고 쉬고 있다면, 곧 그는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하는 젊은이에게 추월 당할 것이다.
119:100 그것은 무책임한 자랑처럼 들릴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이나 지성이 아니라 순종이다. 즉, 순종지수가 높은 젊은이는 노인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다.
119:101 여기서 우리는 순종의 행동을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최선으로 순종하기 위해서 그 발을 죄악의 길에서 금하였다.
119:102 성경의 성결케 하는 영향력은 놀랍다. 성경의 교훈을 통해 주님께 가르침 받음으로 우리는 죄에 대한 증오심과 거룩에 대한 사랑을 발전시킨다.
119:103 또한 성경은 큰 기쁨의 근원이다. 세상 어떤 책도 성경만큼 즐거움을 줄 수 없다. 꿀이 달콤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 달콤하다.
119:104 위조 지폐를 가려내기 위해 사람들은 진짜지폐를 연구 한다. 그처럼 진리를 깊이 알고 있으면 모든 거짓 행위(way)를 가려내고 제거할 수 있다.
119:105 말씀은, 소극적으로는 어떤 행동방식을 금함으로써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바른 길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이 등(燈)의 따뜻함에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 지!
119:106 여기에 성경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거룩한 결단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위한 것이요, 그리고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119:107 스펄젼은 이렇게 말한다. “앞 절에서는 시편 기자가 주의 군사로 맹세를 했지만, 이 구절에서는 그러한 맹세에 걸맞은 고난을 당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를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해 시련을 당케 하는 것이다.”
119:108 우리는 여호와 앞에 제사장과 학생으로 나아온다.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인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히 13:15). 학생으로서 우리는 우리 마음과 생각을 그분의 거룩한 가르침을 향해 열어놓는다.
119:109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위경에 처할 때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기억함으로 안전과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조급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는 경향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극복해야 한다.
119:110 말씀으로 가르침 받는 자들은 사단의 궤계에 대해 무지 하지 않다. 그들은 말씀에 단순히 순종함으로 사단의 올무를 벗어난다.
119:111 성경은 값진 소유물이요 소중한 기업처럼 선택되어야 한다. 큰 재산을 물려받을 때 상속자가 누리는 기쁨이 어떠하겠는가! 하물며 책 중의 책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의 기쁨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119:112 성경의 가치를 깨달은 모든 자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 가르침에 순종하기로 결심한다. 순종의 학교에는 방학도, 휴강도 없다.
119:113 모팻은 이 구절을 이렇게 옮기고 있다. “내가 반과 반으로 된 사람들(men who are half and half)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한 순간에는 하나님 편에 섰다가 다음 순간에는 세상 편에 선다. 그들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있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자들이다.
119:114 여호와는 추적당할 때 우리의 피난처요, 정면으로 공격 당할 때 우리의 방패이시다. 그분의 약속을 바라는 자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그분은 속이거나 속임을 당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119:115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된 행동과는 떨어져 있지만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 계속 접촉을 유지한다.
119:116 이 기도의 요지는 이러하다. “주께서 나를 붙들겠다고 약속하셨나이다. 이제 말씀하신대로 행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나를 버렸다고 사람들이 말할 것이며, 나는 소망이 좌절될 것이 옵니다.”
119:117 우리가 스스로 안전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면 우리가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할은 그분의 율례를 항상 주의하는 것이다.
119:118 여호와는 그분의 율례를 떠나는 자들을 거들떠보지 않으신다. 그들의 영특함은 언젠가 우둔함으로 그 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119:119 제련사가 쇳물의 표면에 떠오르는 찌꺼기를 걸러내 듯이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제거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만일 그분이 죄를 공의롭게 처리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 분의 기록된 말씀을 존중할 수 없을 것이다.
119:120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 바네스의 표현대로, 우리는 “그분의 법의 엄격성과 영성과 가혹성에 대한 경외심으로 마음이 가득할 것이다.”
119:121 공(公)과 의(義)를 행했다는 시편 기자의 주장은 일반적인 원칙으로 이해해야지 불변의 원칙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의 의로운 삶은 하나님의 구원의 열매였으며, 따라서 압제자의 손에 자신을 넘기지 말아 달라고 여호와께 구할 수 있는 합당한 근거였다.
119:122 보증인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고 대표하는 사람이다. 갈보리에서 우리의 보증인이 되셨던 그분이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우리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변호하시며, 교만한 압제자를 물리쳐주신다.
119:123 여기에 그 눈이 피곤할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바란 사람이 있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를 위해 개입하시겠다는 의로운 약속이 이뤄지기를,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렸다.
119:124 121절에서는 정당한 요구를 하는 듯 당당한 모습이었으나 여기서는 여호와의 자비 혹은 은혜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분의 자비의 한 형태는 은혜로운 가르침 사역이다. “주의 율례로 내게 가르치소서.”
119:125 종은 주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유용하고 능률적인 종이 될 수 있다. 그처럼 우리는 그분의 증거에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지각이 필요하다.
119:126 상황이 뒤바뀌었다. 이제 종이 간접적으로 주인에게 행동을 요청하고 있다. 그분의 법이 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위경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이 부르짖는 호소이다.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119:127 성경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늠하는 한 가지 증표는 성경을 읽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냐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정금보다 더 귀히 여긴다면 그 표지는 닳고 그 내지는 헤어질 것이다.
119:128 우리가 성경을 존중히 여기는 또 다른 증거는 그것에 순 종하는 정도이다. 만일 그 말씀을 준행하고 모든 거짓된 행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119:129 하나님의 말씀은 그 무한성과 순수성과 정확성과 조화성과 보편타당성과 능력과 충족성에 있어 놀랍다. 그러한 책은 마땅히 읽혀지고 주의를 모아야 한다.
119:130 성경을 열면 나라든 가정이든 개인이든 빛을 받는다. 성경이 온 세상에 미친 거룩한 감화력은 헤아릴 수 없다. 성경은 스스로 우둔하게 여기며 도움을 원하는 자들에게 깨달음을 준다.
119:13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고도 큰 갈증을 갖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갖춰야 할 마음이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벧전 2:2).
119:132 우리는 이러한 반복된 도움 요청에 싫증을 느낄 수 있으나, 시편 기자는 싫증을 느끼지 않았으며, 하나님도 역시 그러하시다. 우리는 이생을 살면서 결코 그분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 이를 수 없다.
119:133 여기에 거룩이라는 동전의 두 면이 있는데, 하나는 그분의 말씀을 쫒아 여호와께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는 내주하는 죄의 세력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119:134 이 기도의 앞 부분은 비범하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의 압박에서 건짐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비범한 목적을 주목하라.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을 지키리이다.”
119:135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중에, 그분의 은총과 임재와 능력의 증표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분은 우리의 기도에 답하여 격려의 보너스를 내리시는 법을 아신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더 가르침 받고자 하는 열망을 결코 잃어서는 안 된다.
119:136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른다니, 이 얼마나 깊은 고뇌와 슬픔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인가! 무엇 때문에 그렇다는 것인가? 시편 기자 자신에 대한 부당함 때문에? 아니다. 하나님의 법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그로써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다. “‘슬픈 성모’(Stabat Mater)의 저자인 벤데티(Bendetti)가 어느 날 울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Love)이 사랑 받지 못하고 계시기에 울고 있습니다’.”
119:137 성경의 저자는 의로우시며, 따라서 성경 역시 정직하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과 경배를 올리는 사람은 몇 이나 될까!
119:138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의롭고 성실하며, 그분의 말씀은 완전히 믿을 만 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119:139 바네스는 이렇게 통찰력 있게 말한다. “핍박자와 포행자와 비방자들의 행위를 바라보면서 그 자신을 괴롭히는 것보다 하나님의 법을 침해하는 것을 더 슬퍼한다는 것은 인간의 영혼의 커다란 승리이다.”
119:140 성경은 충분히 검증된 책이다. 그 약속을 수천 번 시험해 보아 진실임이 밝혀졌다. “성경은 사람들의 증오와, 격노한 사제들의 공격과, 무신론자들의 조롱과, 현대 비평가들의 세속 지혜를 극복하고 보존되었다”(Scripture Union).
119:141 대적들이 보기에 시편 기자는 미천하여 멸시를 당했다. 그러나 사람의 조롱이 그로 성경을 붙든 손을 놓게 하지 못했다.
119:142 하나님의 의(義)는 스쳐 지나가는 분위기가 아니라 영원한 가치이다. 성경이 진리를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치가 않다. 성경이 진리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이다.
119:143 시편 기자는 환란과 우환이 가득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의 눈물 위에 드리운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119:144 하나님의 증거는 현재만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항상 그러하다. 그것을 이해하면 할수록 이생과 내세에서 삶을 누리는 우리의 능력이 커질 것이다.
119:145 ‘부르짖다’는 단어가 이 단락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뢰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호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능력의 하나님은 온전한 마음에서 나오는,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열망을 드러내는 기도를 물리칠 수 없으시다.
119:146 베드로처럼 파도 밑으로 빠져들 때 우리는 항상 “나를 구하소서”라는 외마디 기도를 올릴 수가 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일으키사 다시 그분을 위해 살도록 힘을 주신다.
119:147 웨이글(Weigle)은 이렇게 표현했다. “이것은 묵상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는 경건한 사람의 헌신적인 습관을 묘사해준다.” “성경 없이는 아침식사도 없다”(No Bible, no breakfast)가 우리의 생활철칙이 되어야 한다.
119:148 잠 못 이루는 밤도 묵상시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따금 씩, 그러한 시간에 주님은 ‘어두움의 보화’를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119:149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존전에 즉시 나아간다는 놀라운 사실을 결코 부정해서는 안 된다. 시편 기자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보호하도록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할 수 있다.
119:150 대적이 가까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에게 해를 끼치고자 한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 미치는 하나님의 법의 권위를 거절한 까닭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119:151 그러나 여호와께서 가까이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 선 자가 다수(多數)이다. “승리자의 편에 선 우리를 아무 대적도 해치지 못하며, 아무 두려움도 놀라게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그분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119:152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서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크나 큰 위로가 된다. “의심과 두려움의 거센 폭풍이 몰려오거든 실패하지 않는 약속 위에 굳게 서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이길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 위에 굳게 서라.”
119:153 여호와는 진정 우리의 고난을 돌아보신다.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모든 고통을 슬픔의 사람이 함께 느끼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붙드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임하신다.
119:154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변호자요 생명의 수여자가 되어 달라고 구한다. 그에 대해 맹렬한 비난이 퍼부어졌다. 그는 변호자가 필요했다. 그는 지쳐서 쓰러지기까지 핍박을 받았다. 그는 생명을 새로이 불어넣어줄 자가 필요했다.
119:155 하나님은 사람들을 그 의지에 반하여 구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천국을 원치 않는 사람들로 채우고자 하지 않으신다. 말씀 듣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다.
119:156 인간의 어떤 언어도 하나님의 긍휼을 표현하기에 충분 하지 못하다. 그분의 인자하심은 아무리 우리가 요청해도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핍박 중에 있는 시편 기자는 생명의 구제, 즉 그를 죽이고자 하는 자들에게서 건짐 받기를 구했다.
119:157 본문 중 여러 구절들이 물론 주 예수님에게서 참된 성취를 보았다. 핍박자와 대적에게 에워싸인 중에도 그분은 여전히 아버지의 증거에 충성을 다했다.
119:158 자기 자신에 대한 악행보다 하나님께 대한 모독을 더 슬퍼한다는 것은 영적인 성숙의 증표이다. 우리 모두 이처럼 주님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다면!
119:159 153절에서 시편 기자는 “나의 고난을 보소서”라고 고백했다. 여기서는 스펄젼의 표현을 빌면, “나의 애정(affection), 즉 법도에 대한 애정을 보소서”라고 고백한다. 또한 그는 이 단락에서 세 번째로 생명의 보존을 구했다(154,156).
119:160 하나님의 말씀은 그 강령(綱領,entirety)에 있어 진리이다. 그 안의 모든 약속이 확실히 성취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119:161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종종 하나님의 종들을 압제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경외심과 두려움이 신실한 자들로 주님을 배신하지 못하게 한다.
119:162 성경을 탐구하여 놀라운 영적인 부요를 발견하는 자는 숨은 보물상자를 찾은 것과 같은 희열을 경험한다.
119:163 말씀을 잘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율법) 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거짓말)을 미워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을 쫒아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에 품게 된다.
119:164 ‘일곱’은 완전 혹은 완성의 수이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가 그분의 의로운 규례로 인해 끊임없이, 전심으로 여호와를 찬양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19:165 말씀은 혼란한 세상에서 평안을, 유혹의 세력에서 안전을 준다. 본문은 신자가 슬픔이나 환란을 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을 순종함으로 죄악의 수렁을 피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119:166 시편 37:3은 “여호와를 기뻐하고 선을 행하라”고 말하는 데, 여기서 시편 기자는 그 권면을 자신이 쫒아 행했다고 고백한다. 먼저는 믿음이 오고, 믿음의 열매로 행위가 따르는 것이다.
119:167 말라기 시대 백성들은 순종을 지겨운 것으로 여겼다(말 1:13). 시편 기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말씀을 순종했으며 더욱더 사랑했다.
119:168 이 단락의 후반부 세 구절은 성경에 대한 실제적인 순종을 말한다. 본문을 일반 신자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혹 생각되거든 그것을 우리 구주의 말씀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문제가 사라진다.
119:169 이 시는 마감이 가까워오면서 열정적인 간구의 분위기가 고조된다. “…하게 하라”(let)는 단어가 일곱 번 발견된다. 먼저는 기도를 들어 달라는 절박한 호소 뒤에, 참된 영적인 깨달음을 달라는 호소가 이어진다.
119:170 이 단락에 의하면 대적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며, 따라서 약속하신 대로 구원해달라는 간구가 반복된다.
119:171 하나님의 율례에 대한 지식의 증가는 교만과 자기 과신이 아니라, 여호와께 대한 찬양과 경배를 가져와야 한다.
119:172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로 씨름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 얘기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의로우며 엄청난 가치가 있다.
119:173 이것은, 전능자의 못자국난 손이 인간에 불과한, 그러나 여호와의 법도를 자신의 삶의 원칙으로 의도적으로 택한 자를 구원 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119:174 우리 영혼의 구원을 성취된 사실로 누리면서, 우리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뤄질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을 소망한다. 그 어간에 우리는 성경을 읽고 순종하는데서 큰 기쁨을 발견한다.
119:175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단지 섬기기 위함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으로는 찬양하기 위함이다. 질병이나 사고로부터의 일체의 구원은 우리의 예배에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고, 우리의 기도에 새로운 긴박성을 부여해야 한다.
119:176 본문은 이 시에 나오는 몇 안되는 죄의 자백 중 하나이다. “거룩한 기쁨의 높디높은 비행(飛行)은 항상 죄와 무가치함을 자백하는 낮은 땅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120편: 비방자의 무력한 희생물
신자의 삶에 있어 고통스런 경험 중 하나는 거짓말과 비방의 희생이 되는 것이다. 그럴때 신자는 “진실이 신발을 신고 있는 동안 거짓말은 온 세상을 활보할 수 있다”고 한 스펄젼의 말이 사실임을 허탈하게 깨닫게 된다. 그는 쉽게 모멸과 좌절의 늪에 빠져든다.
120:1~2 그것이 이 첫 번째 “성전에 올라가는 시” 를 통해 시편 기자가 여호와께 달려가도록 한 환란이었다. 그의 간청은 짧고, 단순하고, 그리고 구체적이었다. 그는 대적들의 거짓된 입술과 이교도들의 궤사한 혀에서 건짐 받기를 원했다.
120:3~4 바로 이어서, 그는 한 악인을 바라보며 엄한 징벌을 예고했다. 그에게 어떤 선고가 내려질까? 궁사의 활에서 날카로운 화살이 그에게 박힐 것이다. 그리고 그 궤사한 혀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 그것이 비누로 깨끗이 씻어질까? 아니다. 그것은 뜨거운 로뎀나무 숯불에 타버릴 것이다! 이 광야식물의 뿌리는 강렬한 열기로 이름난 숯불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120:5 이 서글픈 순간에, 평화를 사랑하는 시편 기자는 메섹과 게달 족속 중에 어쩔 수 없이 머물러 있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했다. 메섹은 야벳의 아들이었으며(창 10:2), 그의 후손은 야만스럽고 미개한 백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이었 으며(창 25:13), 그의 후손 역시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국제표준성경 백과사전(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에 의하면, “모슬렘 민족의 계보는 이스마엘에서 출발하여 게달을 거쳐 모하멧의 후손으로 이어진다.”
120:6~7 시편 기자는 평화를 미워하는 야만족들 가운데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장기간 머물러 있었다.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하려는 그의 노력은 거듭되는 도발행위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만일 그가 신약시대에 살았다면 비방과 다툼을 좀더 잘 대비했을 것이며 좀더 잘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주 예수님의 이러한 본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 23). 그는 베드로의 이러한 가르침을 염두에 둘 수 있었을 것이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 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그리고 그는 주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
119편: 성경에 관한 모든 것
이 시는 성경의 황금 알파벳으로 불려왔다. 그 이유는, 각각 동일한 히브리어 알파벳 문자로 된, 22개 단락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각 단락은 8구절로 되어 있고, 각 단락의 모든 구절은 같은 히브리어 문자로 시작된다. 즉, 원문상에는 첫째 단락의 모든 구절은 알렙 (Aleph)으로 시작되고, 둘째 단락의 모든 구절은 벳(Beth)으로 시작되고, 등등으로 전개되어 있다. NKJV에 의하면, 이 가장 긴 시의 네 구절을 제외한 모든 구절이 하나님의 말씀에 관한 명칭 내지 묘사를 담고 있다. 그 네 예외구절 은 84,121,122,132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묘사하는데 사용된 이름들은 율법, 증거, 도, 법도, 율례, 계명, 규례, 말씀, 약속, 판단, 성실하심, 강령, 의, 명령 등이다. 알파벳을 이렇게 글자 수수께끼식으로 사용함으로써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의 충만성과 완전성을 진술하는데 가능한 모든 인간언어가 총동원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고 리도우트는 지적했다. 신약에서도 이와 유사한 암시를 볼 수 있다. 우리 주님은 자기 자신을 가리켜 알파와 오메가라고 말씀하신다(계 1:8). 알파와 오메가는 물론 헬라어 알파벳의 처음과 마지막 문자이다. 그 말씀은 그분이 모든 알파벳 문자를 결합해서 표현할 수 있는 모든 선하고 완전한 것이 되신다는 뜻이다. 이 시의 어느 두 구절도 똑같은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각 구절마다 조금씩 의미상의 차이가 있다. 이 119편에 대해서 C. S.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이 시는 18편 같은 갑작스런 감정의 분출이 아니며 또 그런 모습도 취하지 않는다. 이 시는 대상에 대한 사랑으로 인해, 또한 여유를 갖고 숙련된 손질을 가하기를 즐거워하는 마음으로 인해, 조용히, 오랜 시간을 들여, 한 땀 한 땀 이어져 만들어지는 수예품과도 같은 작품이다.” 이 시의 여러 단락에 붙여진 다음 소제목들은 주로 F. W. 그랜트의 주해를 참조한 것이다.
1~8절 말씀 순종의 축복
9~16절 말씀을 통한 정결
17~24절 말씀을 통한 분별력
25~32절 말씀을 통한 자기 부족 인식
33~40절 말씀의 능력
41~48절 말씀을 통한 승리
49~56절 말씀을 통한 안식과 위로
57~64절 말씀 안에서 오래 참음
65~72절 형통한 때와 곤란한 때의 말씀의 무한한 가치
73~80절 말씀을 통한 통찰력
81~88절 말씀에 의해 힘을 얻는 고난당하는 자
89~96절 말씀의 영원성
97~104절 말씀을 통한 지혜
105~112절 범사에 등불과 빛이 되는 말씀
113~120절 악인과 말씀
121~128절 말씀을 통한 분리와 구원
129~136절 말씀을 통한 기쁨과 사귐
137~144절 말씀에 대한 열정
145~152절 말씀을 통한 경험
153~160절 말씀을 통한 구원
161~168절 말씀의 완전성
169~176절 말씀을 통한 기도와 찬양
가장 높은 차원의 의미로 볼 때, 이 시는 우리 구주께서 이 지상에 서 인간으로서 경험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사랑을 표현해준다. 또한 “그 충만한 예언적인 의미에서 (이 시는) 참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과 그분의 오랫동안 무시당한 말씀으로 돌이킬 때 고백할 표현이 될 것이다”라고 벨렛은 지적했다.
119:1복 있는 혹은 행복한 자는 그 삶이 여호와의 말씀과 일치되는 자이다. 비록 그가 죄를 범하고 실패하더라도 말씀 안에는 자백하고 돌이킬 수 있는 대책이 있으며 그것이 그를 완전한(흠이 없는) 상태에 머물게 한다.
119:2중요한 것은 그분의 증거에 대한 순종, 다시 말해서, 마지 못해하고, 주저주저하고, 발이 질질 끌리는 그런 순종이 아니라, 전심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해드리려는 깊고도 넘치는 열망이다!
119:3 행복은, 소극적으로는 모든 형태의 죄악으로부터 분리되는 데서 발견되며, 적극적으로는 그분이 우리를 위해 성경에 그려 놓으신 길을 쫒아가는 것이다. 악을 멀리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선을 행하는데 완전히 몰입되는 것이다.
119:4 하나님의 법도는 선택이 아니라 명령이며, 마음 내키는 데로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근실히 지켜야 할 것이다.
119:5 시편 기자는 이제 일반적으로 적용되는 것에서 그 자신의 삶에 적용되기를 원하는 것으로 나아간다. 교훈에서 기도로 서서히 전환하면서 그는, 꾸준히 순종하고자 하는 바램과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
119:6여호와의 모든 율례를 지키는 한 그는 마음을 괴롭히고, 뺨을 붉게 만들고, 때로는 몸마저 움츠러들게 하는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을 것이다.
119:7“기도에서 찬양으로 나아가는 것은 멀거나 어려운 여행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로운 판단에 순종하는 법을 배운 사람은 기쁨이 충만하며, 그로 인해 자발적인 경배에 이르게 된다.
119:8굳은 결심은 겸손한 순종과 짝을 이룬다. 시편 기자는 열심히 주의 율례를 지키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달았다. “나를 아주 버리지 마옵소서”라는 기도는 그렇게 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라 그렇게 되어도 마땅하다고 생각하는 기자 자신의 느낌을 표현한 것이다.
119:9모든 청년의 삶 가운데 가장 중대한 문제 중 하나는 어떻게 순결을 지키느냐는 것이다. 그 답은 성경말씀에 실제적으로 순종하는 것이다.
119:10 거룩의 문제에 있어서는, 인간 편의 간절한 추구와(“내가 전심으로 주를 찾았사오니”) 하나님 편의 능력 부여(“주의 계명에서 떠나지 말게 하소서”)가 있다.
119:11그분은 우리의 의지를 거스르거나 우리의 협력이 없이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지 않는다. 어떤 이는 이렇게 지혜롭게 말했다. “성경에서 최고의 책은 성경이다. 성경을 두는 최고의 장소는 마음 속이다. 성경을 그곳에 둬야하는 최고의 이유는 그것이 우리를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데서 구원해주기 때문이다.
119:12 하나님은 심히 위대하고 심히 은혜로우시기에, 새롭게 된 성품은 그분의 율례를 배우고 그 가르침대로 빚어지기를 소원한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한다!
119:13 말씀의 보화를 심히 즐거워하는 마음은 반드시 그것을 다른이들에게 전하고픈 소원에 이르게 한다. 우리가 진정 뭔가를 믿을 때 그것을 다른 이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은 하나의 삶의 법칙이다.
119:14 성경의 숨은 보배를 찾는 자는 금덩어리를 찾고 기뻐하는 것처럼 기뻐한다.
119:15 하나님의 말씀은 극히 만족스런 묵상을 위한 무한한 재료를 제공해준다. 그러나 그것은 말씀을 준행하는 자가 되고자 하는 결단과 동떨어져서는 안 된다.
119:16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 5:3). 하나님께로서 난 자는 누구나 주의 율례를 즐거워하고, 그것을 항상 기억하고 준행하고자 결심한다.
119:17 그분 없이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우리는 삶에 있어서나 그분의 말씀을 순종하는데 있어서나 그분의 은혜를 필요로 한다. 우리의 필요가 큼으로 그분께 풍성한 은혜를 구하도록 하자.
119:18 성경은 겉으로 보아서는 잘 보이지 않는 기이한 영적인 보배가 풍부하다. 우리의 눈은 그것을 보기 위해 열릴 필요가 있다.
119:19 성경은 나그네를 목적지까지 정확히 안내해주는 지도다.
119:20 성경에 대한 갈증이 심하고 또 늘 유지된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시편 기자의 영혼은 말씀에 대한 사모심에 사로잡혔다. 그는 그러한 뜨겁고 강렬한 마음을 늘 간직했다.
119:21 역사는 교만하고 방자한 자들이 어떻게 주의 계명을 거절하고, 곧 하나님의 능한 손에 의해 멸망당했는지에 대한 사례로 가득하다.
119:22 신자는 세상에게 조롱과 비웃음을 당한다. “이러므로 너희가 저희와 함께 그런 극한 방탕에 달음질하지 아니하는 것을 저희가 이상히 여겨 비방하나”(벧전 4;4). 그러나 성실함은 보상을 받을 것이며, 그분의 “잘하였도다”는 칭찬이 훼방과 멸시를 넉넉히 보상해줄 것이다.
119:23높은 지위에 있는 자들이 핍박할 때에도 그리스도인은 “욕을 받되 대신 욕하지 않고” 성경을 묵상함으로 힘과 위로를 발견할 수 있다.
119:24 메튜 헨리는 이렇게 말한다. “방백들이 비방할 때 다윗이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했는가? 하나님의 율례가 그의 조언자였으며, 그것이 그에게 오래 참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조언해주었다.”
119:25 인생은 정상이 있는가 하면 골짜기도 있다. 우리는 슬픔 중에 가라앉을 때에도 말씀의 회복력으로 소생시켜 달라고 여호와께 구할 수 있다.
119:26 우리가 우리 행위를 고할 때, 즉 우리 죄를 자백할 때, 여호와께서는 용서로 답하신다. 그것은 “주의 율례를 내게 가르치소서”라는 기도로 표현된, 거룩에 대한 새로워진 열망을 갖게 한다.
119:27 우리는 하나님의 법도의 의미와 그것을 삶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는 법을 알아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기사에 대한 묵상을 가져올 것이다.
119:28 우리의 영혼이 눈물에 잠기는 삶의 어두운 순간에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 우리를 굽어 살피사, 종종한 구절의 말씀으로 우리를 일으키사 계속 나아가도록 힘을 주신다.
119:29 하나님의 성령과 말씀을 통해 우리는 진리와 거짓을 구분 할 수 있다. 성경은 모든 형태의 거짓에 대한 거룩한 증오심을 심어 준다. 또한 성경은, 진리란 하나님이 어떤 사물에 관해 말씀하시는 것임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다(요 17:17).
119:30 아무도 스스로 거룩에 이를 수 없다. 그것은 성경에 계시된 성실한 길(the way of truth)을 의도적으로 택할 것을 요구한다. “하나님의 명령은 맞춰야 할 표적이요 쫒아야 할 본이요 걸어야 할 길로 우리 앞에 제시되어야 한다”고 스펄젼은 말했다.
119:31 시편 기자는 접착제로 붙듯이 하나님의 증거를 붙들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자신의 방황하기 쉬운 성향을 깨닫고, 여호와의 도우심을 적극 호소한다.
119:32하나님이 우리에게 큰 머리가 아닌 큰 마음을 주실때 그때 우리는 그분의 계명을 신속히 지키게 된다. 문제는 지식이 아니라 마음이다.
119:33우리는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하나님의 학교의 학생으로서 우리는 가르침을 실천으로 옮기는 법을 열심히 배우고, 그분의 말씀을 생애가 마치는 날까지 준행하기로 결심해야 한다.
119:34 우리는 깨달음을 구해야 한다. 성경에 대해, 그 의미와 요구조항에 대해 올바른 관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그분을 전심으로 쫒을 수 있겠는가?
119:35 우리는 안내를 구해야 한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약하다. 따라서 우리는 주님께서 그분이 원하시는 길로 우리의 발걸음을 안내해주시기를 원한다. 그 길이 우리가 참으로 기뻐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이다.
119:36 우리는 물질적인 부요 보다는 영적인 부요를 구해야 한다.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딤전 6:6). 어떤 사람에게서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져가고 그 대신 성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채워준다는 것은 은혜의 기적이 아닐 수 없다.
119:37 우리는 그림자가 아닌 하나님의 실제를 구해야 한다. 여기에 TV에 대한 하나님의 지침이 있다. “내 눈을 돌이켜 허탄한 것을 보지 말게 하시고.” TV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세계를 묘사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인생을 사실 그대로 다루고 있다.
119:38 우리는 주의 약속을 세우시도록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 “주의 은혜의 모든 강물을 내가 주장하며, 모든 약속에 내 이름을 기록하네.” 그분의 약속에 대한 우리의 주장은 우리가 그분을 경외한다는 사실에 달려있다.
119:39 우리는 훼방에서, 즉 주 예수님의 이름에 수치나 불명예를 끼칠 만한 일체의 것에서 떠나기를 구해야 한다. 그분의 규례는 선하며, 우리는 그것을 신실히 쫒아야 한다.
119:40 우리는 개인적인 부흥을 구해야 한다. “뜨거운 사막이 변하여 못이 될 것이며 메마른 땅이 변하여 원천이 될 것이며…”(사 35:7). 우리가 그분의 법도를 간절히 사모할 때 그분은 그분의 의로 우리를 소성케 하실 것이다.
119:41 우리는 하나님의 인자하심과 구원을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우리는 처음 구원받았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분의 긍휼과 보호를 필요로 한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우리를 돌아보고 지키시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주장해야 한다.
119:42 여호와의 기도응답에 대한 부인할 수 없는 증거는 불신자 들의 훼방을 침묵시키는데 기여한다. 우리의 믿음은 결코 실패할리 없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다.
119:43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두려워하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규례를 바란다면, 그분은 그분을 위해 증거할 기회를 계속해서 허락하실 것이다.
119:44 그분의 사랑과 은혜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살아있는 동안 그분의 말씀을 지키겠다고 굳게 다짐하는 것이다. “그분이 나를 위해 이루신 모든 일을 생각할 때 어찌 내가 내 최선을 드리고 온전히 그분을 위해 사는 것 외에 무엇을 달리 생각하리요?”
119:45 하나님의 아들에 의해 자유케된 자들은 진정 자유하다 (요 8:36). 세상은 그리스도인의 삶을 속박된 체계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분의 법도를 구하는 자들은 완전한 자유를 누리는 자들이다.
119:46 믿음은 열 왕 앞에서 예수님을 증거하는 담력을 준다. 얼마나 많은 군주들이 겸손하고, 종종 멸시당하던 신복들에게서 복음 을 들었는지!
119:47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 안에서 깊은 개인적인 기쁨을 얻는다. 성경은 기쁨의 샘이요 즐거움의 강이요 결코 마르지 않는 만족의 근원이다.
119:48 우리는 그 범위와 그 깊이와 그 능력과 그 보화와 그리고 그 무한함에 놀라 서있다는 의미에서 성경을 경외한다. 우리는 그 내용과 그 끼친 영향력으로 인해 성경을 사랑한다. 그리고 우리는 성경을 밤낮 묵상한다.
119:49 하나님이 자신의 약속을 잊을리 만무하지만, 그러나 고난의 풀무에서 믿음이 다 바닥이 날 때 우리는 “주여, 기억하소서” 라고 기도를 올릴 수 있다. “그분이 자신의 이름을 의지하라고 가르치고는 이렇게 우리로 수치를 당하게 놔두실리 없어.”
119:50 말씀의 소성케 하는 능력을 체험한 자들은 말씀이 위로의 확실한 근원임을 알게 된다. 슬기로운 자의 말은 종종 공허하고 무익할 수 있으나,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살아있고, 적절하고, 또 효과적이다.
119:51 만일 우리가 여호와께 신실하다면 우리가 마땅히 받을 비방과 조롱의 몫을 받을 것을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영적인 원리를 발견했을 때는 그 원리에 충실해야 한다.
119:52 우리는 과거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어떻게 개입하셨는지를 기억함으로써 격려를 받는다. 우리를 이제까지 인도하신 그 동일한 자비가 남은 길도 확실히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의 과거의 사랑은 우리로 그분이 마침내 우리를 어두움에 빠지게 내버려둘 것이라고 생각하지 못하게 한다.”
119:53 하나님의 율법이 욕을 당하고 거부당하는 것을 볼 때 신자는 격분하게 된다. 주 예수님도 그러하셨다.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롬 15:3). 아버지에 대한 어떤 불명예도 아들에게 개인적인 모욕으로 받아들여졌다.
119:54 하나님의 놀라운 말씀으로 인해 나그네는 나그네 된 집에서, 혹은 낙스의 표현대로 “추방자의 땅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다. 길이 거칠어도 멀지 않다. 밤이 어두워도 하나님이 노래를 주신다.
119:55 끝없이 계속될 것 같은 잠 못 이루는 밤은 말씀 안에 계시된 주님을 묵상하는 시간으로 바뀔 수 있다. 그분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더욱 그분을 사랑하게 되며, 그분을 사랑하면 할수록 더욱 그 분의 율법을 지키고자 하게 된다.
119:56 순종은 축복이다.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딤전 4:8).
119:57 우리가 주님 안에서 얼마나 비할 데 없는 보배를 소유하고 있는지 깨달을 때 우리는 그분의 말씀을 지키기로 서원하게 된다. 그분은 모든 것에 충족하신 분이시다. 그분을 소유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으리 만치 부요케 되는 것이다.
119:58 그분은 모든 것에 충족하시지만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우리의 만족은 오직 하나님께로서 났느니라”(고후 3:5).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고 그분의 자비의 약속을 주장하는 기도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119:59 인도(Guidance)는 늘상 일어나는 문제이다. 어느 길로 가야 할까? 솔직히, 우리 자신에게는 그것을 알 만한 지혜가 없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경에 그려진 길로 우리의 발길을 돌려야 할 것이다.
119:60 오늘날 우리는 즉석음식, 즉석 서비스 등 즉석 시대에 살고 있다. 하나님의 계시된 뜻에의 즉석 순종이야 말로 생각할 만한, 생산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119:61 악인이 무고한 신자를 넘어뜨리려고 꾀할 수 있으나, 그 때문에 신자는 더욱 인도와 보호를 위해 말씀을 기억한다.
119:62 “밤중쯤 되어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미하매”(행 16:25). 그들은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해를 당했으나 여전히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judgments)에 관해 찬양할 수 있었다.
119:63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은 그분의 백성을 사랑한다. 그리고 성경을 사랑하는 자들은 모든 성경애호가를 사랑한다. 그것은 국가와 사회와 인종의 구별을 초월하는 범세계적인 사귐이다.
119:64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은 세상 어디서나 발견할 수 있다. 아니, 세상은 그것으로 충만하다. 우리의 감사하는 마음은 “주여, 나로 주의 성령으로 가르침 받게 하소서”라는 고백으로 반응한다.
119:65 그분이 말씀대로 나를 선대하신 그 놀라운 행사로 인해 여호와께 감사한지가 얼마나 오래 되었는가? “네가 받은 복을 세어 보고 하나씩 열거해보라. 그러면 여호와께서 행하신 일로 인해 놀라게 될 것이다!”
119:66 우리 모두는 지식만이 아니라 명철(good judgment)도 구해야 한다. 분별력이나 균형감각 없이 지식을 소유할 수도 있다. 말씀과 삶의 훈련을 통해 우리는 좋은 지각을 얻는다.
119:67 하나님의 징계는 “그로 말미암아 연단한 자에게는 의의 평강한 열매를 맺는다”(히 12:11). 방황으로 인해 치른 대가를 기억할 때 우리는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고자 하는 경각심을 갖게 된다.
119:68 “하나님(God)”과 “선하다”(good)는 영어 단어는 어근이 같은지도 모른다. 하나님은 선하시며, 하시는 모든 일이 선하다. 선하게 되려면 우리는 그분의 멍에를 메고 그분에게서 배워야 한다.
119:69 경건치 않은 자들이 거짓말로 우리의 평판을 손상시키려 할 때 우리는 신실히, 요동치 않고 성경말씀을 순종함으로써 보호를 얻을 수 있다.
119:70 세속적인 자들로 사치와 쾌락에 탐닉하게 하라. 우리는 육체적인 방종이 아닌 영적인 교훈에서 만족을 발견한다.
119:71 고난은 잠시뿐이지만 고난의 축복은 영원하다. 사람들이 우리를 해치려고 핍박을 꾀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선으로 바꾸신다.
119:72 성경은 세상에서 우리가 소유한 가장 가치 있는 자원이다. 컴퓨터가 아무리 큰 수를 기록한다 해도 성경의 가치만큼은 기록할 수 없다.
119:73 하나님이 놀라운 솜씨로 우리를 지으셨을진대 그분이 우리의 교사가 되는 것보다 더 합리적인 것이 있겠는가! 우리는 우리를 지으신 그분의 목적을 발견하고 그것을 철저히 이뤄야 한다.
119:74 주 예수님을 뜨겁게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을 만날 때 우리는 영적인 신선함을 얻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라는 자들은 성령으로 말미암는 강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다.
119:75 질병과 고난과 역경은 직접 하나님께로서 오지 않는다. 한편 하나님은 특정한 상황에서 그것들을 허락하사 자신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신다. 그러한 상황에서 그분의 의로우심과 성실하심을 기억한다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성숙한 증거이다.
119:76 그러나 여전히 우리는 연약한 진토이며, 우리를 붙들어줄 그분의 연민의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 4:16).
119:77 하나님의 긍휼히 여기심은 고된 압박을 당하는 성도에게 생명을 새로이 불어넣는 것과도 같다. 그분의 법을 즐거워하는 자들은 그분이 돕기 위해 곁에 오신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다.
119:78 겔리뉴(Gelineau)는 이 구절을 이렇게 옮기고 있다. “거짓으로 나를 해롭게 하는 교만한 자로 수치를 당케 하소서. 나는 주의 법도를 묵상하리이다.” 하나님은 죄가 역사하도록 허락하시며, 시편 기자는 말씀하신대로 행하시라고 하나님께 구하고 있다.
119:79 하나님의 말씀을 알고 사랑하는 자들과 사귐을 가지려 하는 것은 영적인 본능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이 우리에게 오기를 얼마나 구하고 있는가?
119:80 우리가 주의 율례를 순종하는데 흠이 없기를 원해야 하는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시편 기자가 여기서 생각한 한가지는 죄에 빠지는 그 말할 수 없는 부끄러움을 당치 않기 위해서이다.
119:81 신자는 고난 당해도 무너지지 않으며, 당황해도 절망하지 않으며, 핍박을 받아도 버림받지 않으며, 넘어져도 멸망하지 않는다 (고후 4:8,9). 본문에서 그는 하나님의 구원의 도움을 기다리기에 지쳤지만 여전히 소망이 있다.
119:82 비록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이 성취되기를 고대하며 그 눈이 침침해졌지만 그는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라고 기도 하는 대신 “주께서 언제나 나를 안위하시겠나이까?”라고 기도한다.
119:83 ‘연기 중의 가죽 병’은 오그라들고 검게 그슬린 상태이다. 그 비유 그대로, 여기 괴로움 중에 있는 신자는 기다림으로 시들고, 마르고, 흉한 모습이지만, 주의 말씀이 있는 한 절망하지 않는다.
119:84 인생은 아주 짧다. 그 짧음에 비해 고난의 날이 너무 긴것 같다. 여호와께서 압제자들을 징벌하실 때이다.
119:85 본 절의 악인들은 불 경건하고 무법하다. 이 두 특성은 함께 나타난다. 그들은 의인과 무고한 자의 멸망을 꾀하는데,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법을 따르기를 거절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119:86 하나님의 말씀만큼 의지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 분은 그분의 핍박받는 백성을 구원하기로 약속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거짓 고소자들의 공격을 당할 때 “나를 도우소서!”라는 “황금 기도”를 담대히 사용할 수 있다.
119:87 “만일 우리가 법도를 붙잡는다면 약속에 의해 건짐 받을 것이다”라고 스펄젼은 말했다. 혹 절망의 순간에 이를지라도 순종의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 도움이 올 것이다. 믿음을 가지라!
119:88 최선의 기도는 강한 내적인 필요로부터 온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주께서 그의 생명을 보존하사 그분의 말씀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119:89 믿음은 어둠 속으로의 도약(跳躍)이 아니다. 그것은 온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것(성경)에 기초한다. 영원히 하늘에 굳게 선 말씀을 믿는다는 것은 전혀 모험이 아니다.
119:90 하나님의 성실하심은 그분의 말씀에만 아니라 그분의 행사에도 나타나 있다. 그것은 모든 세대에 미치며 자연의 질서와 정밀함 속에 나타나 있다.
119:91 천지는 그분의 법에 순종한다. 파종하는 때와 거두는 때, 추위와 더위, 여름과 겨울, 낮과 밤 등 모두가 하나님의 종이다. 그리고 모든 것이 그분의 말씀의 능력에 의해 정해지고 유지된다.
119:92 바네스는 이렇게 말한다. “아주 훌륭한, 그러나 고난을 많이 겪은 한 성도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만일 영원하신 하나님이 너의 처소가 되시니 그 영원하신 팔이 네 아래 있도다(신 33:27)라는 하나님의 말씀 속의 한 선언이 없었다면 나는 1천 번은 넘어졌을 것입니다’.”
119:93 성경의 능력을 삶에서 경험한 자들은 그것을 잊을 수 없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요,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된 것이다 (벧전 1:23).
119:94 우리는 죄의 형벌에서 구원받은 후에도 더럽힘과 손상으로부터 날마다 구원받을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법도와 우리 자신을 바로 설때 우리는 이러한 현재시제의 구원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
119:95 악인의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있다면 그것은 영향력 없는 하찮은 삶을 영위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분을 위해 열매를 거두는 한 우리는 반대를 예상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증거를 생각할 때 우리는 힘과 위로를 얻는다.
119:96 이 세상의 제아무리 좋은 것도 완전치 못하고 끝이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완전하고 무한하다. 성경을 알면 알수록 우리는 우리 자신이 얼마나 부족한지를 깨닫게 된다.
119:97 여호와를 사랑하는 자들은 분명 그분의 말씀 또한 사랑한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은 기회가 될 때마다 성경을 묵상하는 모습으로 표현될 것이다. 묵상의 순간에 우리는 성경에서 새로운 아름다움과 놀라움을 발견하게 된다.
119:98 말씀의 지혜로 무장된 겸손한 신자는 그의 대적들이 발끝으로 서서 보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무릎을 꿇고 볼 수 있다.
119:99 만일 스승이 자신의 위치에 스스로 만족하고 쉬고 있다면, 곧 그는 끊임없이 말씀을 묵상하는 젊은이에게 추월 당할 것이다.
119:100 그것은 무책임한 자랑처럼 들릴지 모르나 그렇지 않다. 중요한 것은 나이나 지성이 아니라 순종이다. 즉, 순종지수가 높은 젊은이는 노인을 능가할 수 있는 것이다.
119:101 여기서 우리는 순종의 행동을 볼 수 있다. 시편 기자는 최선으로 순종하기 위해서 그 발을 죄악의 길에서 금하였다.
119:102 성경의 성결케 하는 영향력은 놀랍다. 성경의 교훈을 통해 주님께 가르침 받음으로 우리는 죄에 대한 증오심과 거룩에 대한 사랑을 발전시킨다.
119:103 또한 성경은 큰 기쁨의 근원이다. 세상 어떤 책도 성경만큼 즐거움을 줄 수 없다. 꿀이 달콤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더 달콤하다.
119:104 위조 지폐를 가려내기 위해 사람들은 진짜지폐를 연구 한다. 그처럼 진리를 깊이 알고 있으면 모든 거짓 행위(way)를 가려내고 제거할 수 있다.
119:105 말씀은, 소극적으로는 어떤 행동방식을 금함으로써 우리를 인도한다.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바른 길을 보여줌으로써 우리를 인도한다. 우리는 이 등(燈)의 따뜻함에 얼마나 큰 빚을 지고 있는 지!
119:106 여기에 성경말씀에 순종하기 위한 거룩한 결단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요, 다른 사람들의 축복을 위한 것이요, 그리고 우리 자신의 유익을 위한 것이다.
119:107 스펄젼은 이렇게 말한다. “앞 절에서는 시편 기자가 주의 군사로 맹세를 했지만, 이 구절에서는 그러한 맹세에 걸맞은 고난을 당하라는 요청을 받았다. 주님을 섬긴다는 것은 우리를 시련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우리를 위해 시련을 당케 하는 것이다.”
119:108 우리는 여호와 앞에 제사장과 학생으로 나아온다. 제사장으로서 우리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인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린다(히 13:15). 학생으로서 우리는 우리 마음과 생각을 그분의 거룩한 가르침을 향해 열어놓는다.
119:109 우리의 삶이 끊임없이 위경에 처할 때 우리는 여호와의 율법을 기억함으로 안전과 안정을 찾을 수 있다. 쉽게 두려움에 사로잡히고 조급해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잊어버리는 경향은 어떤 대가를 치러서라도 극복해야 한다.
119:110 말씀으로 가르침 받는 자들은 사단의 궤계에 대해 무지 하지 않다. 그들은 말씀에 단순히 순종함으로 사단의 올무를 벗어난다.
119:111 성경은 값진 소유물이요 소중한 기업처럼 선택되어야 한다. 큰 재산을 물려받을 때 상속자가 누리는 기쁨이 어떠하겠는가! 하물며 책 중의 책을 소유하고 있는 우리의 기쁨은 얼마나 더 크겠는가!
119:112 성경의 가치를 깨달은 모든 자는 생명이 다하는 날까지 그 가르침에 순종하기로 결심한다. 순종의 학교에는 방학도, 휴강도 없다.
119:113 모팻은 이 구절을 이렇게 옮기고 있다. “내가 반과 반으로 된 사람들(men who are half and half)을 미워하고 주의 법을 사랑하나이다.” 두 마음을 품은 사람들은 한 순간에는 하나님 편에 섰다가 다음 순간에는 세상 편에 선다. 그들은 한 입으로 두 말을 할 수 있는 자들이며, 하나님의 법을 거역하는 자들이다.
119:114 여호와는 추적당할 때 우리의 피난처요, 정면으로 공격 당할 때 우리의 방패이시다. 그분의 약속을 바라는 자들은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그분은 속이거나 속임을 당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119:115 우리는 우리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들과 함께 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의 죄악된 행동과는 떨어져 있지만 그들에게 복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우리는 이 세상 사람들과 계속 접촉을 유지한다.
119:116 이 기도의 요지는 이러하다. “주께서 나를 붙들겠다고 약속하셨나이다. 이제 말씀하신대로 행하소서. 그렇지 않으면 주께서 나를 버렸다고 사람들이 말할 것이며, 나는 소망이 좌절될 것이 옵니다.”
119:117 우리가 스스로 안전할 수 없는 것은 우리 스스로를 구원 할 수 없었던 것과 같다.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붙드시면 우리가 안전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역할은 그분의 율례를 항상 주의하는 것이다.
119:118 여호와는 그분의 율례를 떠나는 자들을 거들떠보지 않으신다. 그들의 영특함은 언젠가 우둔함으로 그 본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119:119 제련사가 쇳물의 표면에 떠오르는 찌꺼기를 걸러내 듯이 하나님은 이 땅의 모든 악인을 제거하실 것이라고 성경은 분명히 가르친다. 만일 그분이 죄를 공의롭게 처리하지 않으신다면 우리는 그 분의 기록된 말씀을 존중할 수 없을 것이다.
119:120 악인에 대한 하나님의 판단을 생각할 때 우리는 두려워 떨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한편 바네스의 표현대로, 우리는 “그분의 법의 엄격성과 영성과 가혹성에 대한 경외심으로 마음이 가득할 것이다.”
119:121 공(公)과 의(義)를 행했다는 시편 기자의 주장은 일반적인 원칙으로 이해해야지 불변의 원칙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의 의로운 삶은 하나님의 구원의 열매였으며, 따라서 압제자의 손에 자신을 넘기지 말아 달라고 여호와께 구할 수 있는 합당한 근거였다.
119:122 보증인은 다른 사람을 대신하고 대표하는 사람이다. 갈보리에서 우리의 보증인이 되셨던 그분이 우리가 사는 날 동안 우리의 문제를 성공적으로 변호하시며, 교만한 압제자를 물리쳐주신다.
119:123 여기에 그 눈이 피곤할 때까지 하나님의 구원을 바란 사람이 있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를 위해 개입하시겠다는 의로운 약속이 이뤄지기를, 지쳐 쓰러질 때까지 기다렸다.
119:124 121절에서는 정당한 요구를 하는 듯 당당한 모습이었으나 여기서는 여호와의 자비 혹은 은혜에 자신을 내맡긴다. 그분의 자비의 한 형태는 은혜로운 가르침 사역이다. “주의 율례로 내게 가르치소서.”
119:125 종은 주인에 대해 알면 알수록 더 유용하고 능률적인 종이 될 수 있다. 그처럼 우리는 그분의 증거에 계시된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는 지각이 필요하다.
119:126 상황이 뒤바뀌었다. 이제 종이 간접적으로 주인에게 행동을 요청하고 있다. 그분의 법이 폐해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은 위경에 처할 때마다 하나님의 백성이 부르짖는 호소이다. “지금은 여호와의 일하실 때니이다.”
119:127 성경이 우리에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가늠하는 한 가지 증표는 성경을 읽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들이냐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것을 정금보다 더 귀히 여긴다면 그 표지는 닳고 그 내지는 헤어질 것이다.
119:128 우리가 성경을 존중히 여기는 또 다른 증거는 그것에 순 종하는 정도이다. 만일 그 말씀을 준행하고 모든 거짓된 행위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119:129 하나님의 말씀은 그 무한성과 순수성과 정확성과 조화성과 보편타당성과 능력과 충족성에 있어 놀랍다. 그러한 책은 마땅히 읽혀지고 주의를 모아야 한다.
119:130 성경을 열면 나라든 가정이든 개인이든 빛을 받는다. 성경이 온 세상에 미친 거룩한 감화력은 헤아릴 수 없다. 성경은 스스로 우둔하게 여기며 도움을 원하는 자들에게 깨달음을 준다.
119:131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고도 큰 갈증을 갖는 것은 우리 모두가 갖춰야 할 마음이다. “갓난 아이들같이 순전하고 신령한 젖을 사모하라”(벧전 2:2).
119:132 우리는 이러한 반복된 도움 요청에 싫증을 느낄 수 있으나, 시편 기자는 싫증을 느끼지 않았으며, 하나님도 역시 그러하시다. 우리는 이생을 살면서 결코 그분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은 상황에 이를 수 없다.
119:133 여기에 거룩이라는 동전의 두 면이 있는데, 하나는 그분의 말씀을 쫒아 여호와께로 꾸준히 나아가는 것이고, 하나는 내주하는 죄의 세력에서 건짐을 받는 것이다.
119:134 이 기도의 앞 부분은 비범하지 않다. 우리는 누구나 사람의 압박에서 건짐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그 비범한 목적을 주목하라.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법을 지키리이다.”
119:135 우리는 주님을 섬기는 중에, 그분의 은총과 임재와 능력의 증표를 요구할 수도 있다. 그분은 우리의 기도에 답하여 격려의 보너스를 내리시는 법을 아신다. 그리고 우리는 더욱더 가르침 받고자 하는 열망을 결코 잃어서는 안 된다.
119:136 눈물이 시냇물처럼 흐른다니, 이 얼마나 깊은 고뇌와 슬픔을 극적으로 표현한 말인가! 무엇 때문에 그렇다는 것인가? 시편 기자 자신에 대한 부당함 때문에? 아니다. 하나님의 법을 사람들이 무시하고 그로써 그분의 이름을 욕되게 하기 때문이다. “‘슬픈 성모’(Stabat Mater)의 저자인 벤데티(Bendetti)가 어느 날 울고 있었다. 눈물을 흘리는 이유를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사랑(Love)이 사랑 받지 못하고 계시기에 울고 있습니다’.”
119:137 성경의 저자는 의로우시며, 따라서 성경 역시 정직하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그 사실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여호와께 감사하며 찬양과 경배를 올리는 사람은 몇 이나 될까!
119:138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의롭고 성실하며, 그분의 말씀은 완전히 믿을 만 하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것은 자랑할 일이 아니다. 그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119:139 바네스는 이렇게 통찰력 있게 말한다. “핍박자와 포행자와 비방자들의 행위를 바라보면서 그 자신을 괴롭히는 것보다 하나님의 법을 침해하는 것을 더 슬퍼한다는 것은 인간의 영혼의 커다란 승리이다.”
119:140 성경은 충분히 검증된 책이다. 그 약속을 수천 번 시험해 보아 진실임이 밝혀졌다. “성경은 사람들의 증오와, 격노한 사제들의 공격과, 무신론자들의 조롱과, 현대 비평가들의 세속 지혜를 극복하고 보존되었다”(Scripture Union).
119:141 대적들이 보기에 시편 기자는 미천하여 멸시를 당했다. 그러나 사람의 조롱이 그로 성경을 붙든 손을 놓게 하지 못했다.
119:142 하나님의 의(義)는 스쳐 지나가는 분위기가 아니라 영원한 가치이다. 성경이 진리를 포함한다고 말하는 것은 충분치가 않다. 성경이 진리이다.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이다.
119:143 시편 기자는 환란과 우환이 가득했으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그의 눈물 위에 드리운 무지개를 볼 수 있었다.
119:144 하나님의 증거는 현재만 의로운 것이 아니라 항상 그러하다. 그것을 이해하면 할수록 이생과 내세에서 삶을 누리는 우리의 능력이 커질 것이다.
119:145 ‘부르짖다’는 단어가 이 단락을 이해하는 열쇠이다. 여기서 우리는 신뢰하는 마음으로 도움을 호소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능력의 하나님은 온전한 마음에서 나오는, 그분의 뜻을 행하려는 열망을 드러내는 기도를 물리칠 수 없으시다.
119:146 베드로처럼 파도 밑으로 빠져들 때 우리는 항상 “나를 구하소서”라는 외마디 기도를 올릴 수가 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우리를 일으키사 다시 그분을 위해 살도록 힘을 주신다.
119:147 웨이글(Weigle)은 이렇게 표현했다. “이것은 묵상과 기도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동이 트기 전에 일어나는 경건한 사람의 헌신적인 습관을 묘사해준다.” “성경 없이는 아침식사도 없다”(No Bible, no breakfast)가 우리의 생활철칙이 되어야 한다.
119:148 잠 못 이루는 밤도 묵상시간으로 활용될 수 있다. 이따금 씩, 그러한 시간에 주님은 ‘어두움의 보화’를 우리에게 허락하신다.
119:149 우리는 기도로 하나님의 존전에 즉시 나아간다는 놀라운 사실을 결코 부정해서는 안 된다. 시편 기자처럼 우리는 우리의 삶을 보호하도록 하나님의 인자하심에 호소할 수 있다.
119:150 대적이 가까이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종에게 해를 끼치고자 한다. 그들은 그들의 삶에 미치는 하나님의 법의 권위를 거절한 까닭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119:151 그러나 여호와께서 가까이 계신다. 그리고 하나님 편에 선 자가 다수(多數)이다. “승리자의 편에 선 우리를 아무 대적도 해치지 못하며, 아무 두려움도 놀라게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리이며, 그분은 결코 자기 백성을 버리지 않으신다.
119:152 하나님의 말씀이 영원히 서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크나 큰 위로가 된다. “의심과 두려움의 거센 폭풍이 몰려오거든 실패하지 않는 약속 위에 굳게 서라. 하나님의 살아있는 말씀으로 이길 것이다. 하나님의 약속 위에 굳게 서라.”
119:153 여호와는 진정 우리의 고난을 돌아보신다. “우리 마음을 괴롭히는 모든 고통을 슬픔의 사람이 함께 느끼신다.” 그리고 그분은 그분과 그분의 말씀을 붙드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임하신다.
119:154 시편 기자는 하나님께 자신의 변호자요 생명의 수여자가 되어 달라고 구한다. 그에 대해 맹렬한 비난이 퍼부어졌다. 그는 변호자가 필요했다. 그는 지쳐서 쓰러지기까지 핍박을 받았다. 그는 생명을 새로이 불어넣어줄 자가 필요했다.
119:155 하나님은 사람들을 그 의지에 반하여 구원하지 않으신다. 그분은 천국을 원치 않는 사람들로 채우고자 하지 않으신다. 말씀 듣기를 거절하는 자들에게는 구원이 없다.
119:156 인간의 어떤 언어도 하나님의 긍휼을 표현하기에 충분 하지 못하다. 그분의 인자하심은 아무리 우리가 요청해도 결코 고갈되지 않는다. 핍박 중에 있는 시편 기자는 생명의 구제, 즉 그를 죽이고자 하는 자들에게서 건짐 받기를 구했다.
119:157 본문 중 여러 구절들이 물론 주 예수님에게서 참된 성취를 보았다. 핍박자와 대적에게 에워싸인 중에도 그분은 여전히 아버지의 증거에 충성을 다했다.
119:158 자기 자신에 대한 악행보다 하나님께 대한 모독을 더 슬퍼한다는 것은 영적인 성숙의 증표이다. 우리 모두 이처럼 주님에 대한 열정에 사로잡힌다면!
119:159 153절에서 시편 기자는 “나의 고난을 보소서”라고 고백했다. 여기서는 스펄젼의 표현을 빌면, “나의 애정(affection), 즉 법도에 대한 애정을 보소서”라고 고백한다. 또한 그는 이 단락에서 세 번째로 생명의 보존을 구했다(154,156).
119:160 하나님의 말씀은 그 강령(綱領,entirety)에 있어 진리이다. 그 안의 모든 약속이 확실히 성취된다. “천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율법의 일점일획이라도 반드시 없어지지 아니하고 다 이루리라”(마 5:18).
119:161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이 종종 하나님의 종들을 압제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깊은 경외심과 두려움이 신실한 자들로 주님을 배신하지 못하게 한다.
119:162 성경을 탐구하여 놀라운 영적인 부요를 발견하는 자는 숨은 보물상자를 찾은 것과 같은 희열을 경험한다.
119:163 말씀을 잘 알 때 우리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것(율법) 을 사랑하고.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거짓말)을 미워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하나님을 쫒아 하나님의 생각을 마음에 품게 된다.
119:164 ‘일곱’은 완전 혹은 완성의 수이므로 우리는 시편 기자가 그분의 의로운 규례로 인해 끊임없이, 전심으로 여호와를 찬양했다는 의미로 이해할 수 있다.
119:165 말씀은 혼란한 세상에서 평안을, 유혹의 세력에서 안전을 준다. 본문은 신자가 슬픔이나 환란을 면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을 순종함으로 죄악의 수렁을 피할 수 있다는 의미이다.
119:166 시편 37:3은 “여호와를 기뻐하고 선을 행하라”고 말하는 데, 여기서 시편 기자는 그 권면을 자신이 쫒아 행했다고 고백한다. 먼저는 믿음이 오고, 믿음의 열매로 행위가 따르는 것이다.
119:167 말라기 시대 백성들은 순종을 지겨운 것으로 여겼다(말 1:13). 시편 기자는 그렇지 않았다. 그는 말씀을 순종했으며 더욱더 사랑했다.
119:168 이 단락의 후반부 세 구절은 성경에 대한 실제적인 순종을 말한다. 본문을 일반 신자에게 적용시키는 것이 혹 생각되거든 그것을 우리 구주의 말씀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문제가 사라진다.
119:169 이 시는 마감이 가까워오면서 열정적인 간구의 분위기가 고조된다. “…하게 하라”(let)는 단어가 일곱 번 발견된다. 먼저는 기도를 들어 달라는 절박한 호소 뒤에, 참된 영적인 깨달음을 달라는 호소가 이어진다.
119:170 이 단락에 의하면 대적이 그리 멀지 않은 듯하며, 따라서 약속하신 대로 구원해달라는 간구가 반복된다.
119:171 하나님의 율례에 대한 지식의 증가는 교만과 자기 과신이 아니라, 여호와께 대한 찬양과 경배를 가져와야 한다.
119:172 우리는 중요하지 않은 문제들로 씨름할 것이 아니라 영적인 문제들에 대해 얘기하도록 우리 자신을 훈련시켜야 한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은 의로우며 엄청난 가치가 있다.
119:173 이것은, 전능자의 못자국난 손이 인간에 불과한, 그러나 여호와의 법도를 자신의 삶의 원칙으로 의도적으로 택한 자를 구원 하기 위해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아름다운 그림이다.
119:174 우리 영혼의 구원을 성취된 사실로 누리면서, 우리는 예수께서 다시 오실 때 이뤄질 죄의 존재로부터의 구원을 소망한다. 그 어간에 우리는 성경을 읽고 순종하는데서 큰 기쁨을 발견한다.
119:175 우리가 구원받은 것은 단지 섬기기 위함이 아니라, 보다 직접적으로는 찬양하기 위함이다. 질병이나 사고로부터의 일체의 구원은 우리의 예배에 새로운 동기를 부여하고, 우리의 기도에 새로운 긴박성을 부여해야 한다.
119:176 본문은 이 시에 나오는 몇 안되는 죄의 자백 중 하나이다. “거룩한 기쁨의 높디높은 비행(飛行)은 항상 죄와 무가치함을 자백하는 낮은 땅으로 되돌아와야만 한다.”
120편: 비방자의 무력한 희생물
신자의 삶에 있어 고통스런 경험 중 하나는 거짓말과 비방의 희생이 되는 것이다. 그럴때 신자는 “진실이 신발을 신고 있는 동안 거짓말은 온 세상을 활보할 수 있다”고 한 스펄젼의 말이 사실임을 허탈하게 깨닫게 된다. 그는 쉽게 모멸과 좌절의 늪에 빠져든다.
120:1~2 그것이 이 첫 번째 “성전에 올라가는 시” 를 통해 시편 기자가 여호와께 달려가도록 한 환란이었다. 그의 간청은 짧고, 단순하고, 그리고 구체적이었다. 그는 대적들의 거짓된 입술과 이교도들의 궤사한 혀에서 건짐 받기를 원했다.
120:3~4 바로 이어서, 그는 한 악인을 바라보며 엄한 징벌을 예고했다. 그에게 어떤 선고가 내려질까? 궁사의 활에서 날카로운 화살이 그에게 박힐 것이다. 그리고 그 궤사한 혀에는 어떤 일이 생길까? 그것이 비누로 깨끗이 씻어질까? 아니다. 그것은 뜨거운 로뎀나무 숯불에 타버릴 것이다! 이 광야식물의 뿌리는 강렬한 열기로 이름난 숯불을 만드는데 사용된다.
120:5 이 서글픈 순간에, 평화를 사랑하는 시편 기자는 메섹과 게달 족속 중에 어쩔 수 없이 머물러 있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했다. 메섹은 야벳의 아들이었으며(창 10:2), 그의 후손은 야만스럽고 미개한 백성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게달은 이스마엘의 둘째 아들이었 으며(창 25:13), 그의 후손 역시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국제표준성경 백과사전(International Standard Bible Encyclopedia)에 의하면, “모슬렘 민족의 계보는 이스마엘에서 출발하여 게달을 거쳐 모하멧의 후손으로 이어진다.”
120:6~7 시편 기자는 평화를 미워하는 야만족들 가운데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장기간 머물러 있었다. 평화로운 공존을 도모하려는 그의 노력은 거듭되는 도발행위에 의해 수포로 돌아갔다. 만일 그가 신약시대에 살았다면 비방과 다툼을 좀더 잘 대비했을 것이며 좀더 잘 대처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는 주 예수님의 이러한 본을 생각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욕을 받으시되 대신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자에게 부탁하시며”(벧전 2: 23). 그는 베드로의 이러한 가르침을 염두에 둘 수 있었을 것이다.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서 아름다우니라”(벧전 2:20).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 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3:9). 그리고 그는 주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을 수 있었을 것이다.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였느니라”(마 5:11,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