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공부 시편 139-140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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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7월 07일 2021년본문
시편 139-140편 연구
139편: 하나님은 심히 광대하시다!
“하나님은 심히 광대하시네! 그분이 알지 못하시는 것 없고 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 없고 그분이 할 수 없는 것 없네.” 만일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토록 광대하신 하나님의 대적이 된다면, 그들은 멸망 받아 마땅하다. 그것이 이 장려한 시에 나타난 다윗의 묵상의 흐름이다.
139:1~2
먼저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그분이 알지 못하시는 것 없네. 우주가 무한하고 광대해 보일지라도 그분은 모든 모래알의 영원한 이야기를 아시네.” 그러나 여기서는 개개인의 삶에 대한 그분의 지식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다. 세계인구는 70억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친밀히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 모두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감찰하시고 아셨다! 말과 행동, 생각과 동기 등 그 분은 우리를 훤히 아신다.
139:3
그분은 우리가 걸을 때와 누울 때 우리를 살피신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끊임없이 우리를 지켜 주신다. 우리의 행위 중 아무것도 그분에게 숨기우지 못한다.
139:4
그분은 우리가 말하기 전에 무엇을 말할지를 아신다.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도 완전히 그분 앞에 열려 있다.
139:5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지식이 그토록 완전하므로 그분은 우리의 전후를 지킬 수 있으시다. 항상 그분의 손이 우리를 덮고 보호한다.
139:6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은 우리의 이성을 아연케 한다. 그 지식의 무게 아래 우리의 두뇌는 바짝 오그라든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기엔 너무 높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력의 한계에 이르러 더 이상 가지 못할 때,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의 광대함 앞에 머리 숙여 경배할 수 있다!
139:7~8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무소부재하시다. 그분은 한번에, 같은 시간에 모든 곳에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재하심은 범신론과 같지 않다. 범신론은 피조물이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과 분리되고 구분되는 분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인간이 여호와의 임재를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인간이 하늘로 올라간다면 거기서 하나님을 피하겠는가? 물론 불가능하다.
139:9~10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새벽 날개’는 초당 18만 6천 마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하늘을 가로질러 비추는 아침 햇살을 가리킨다. 우리가 혹 빛의 속도로 우주의 먼 구석까지 여행할 수 있다해도, 거기서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고 붙들기 위해 기다리시는 여호와를 만날 것이다. 우연히도, 9,10절은 우리가 사는 제트 여행시대와 잘 조화를 이룬다.
139:11~12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숨길 어두움을 원한다면 그는 헛된 피난처를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 여호와의 임재를 차단할 수는 없다. 어두움은 그분께는 어둡지가 않다.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하나님은 도저히 피할 수 없다. 파스칼의 말대로 “그분의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나, 그분의 원주(圓周)는 어디에도 없다.”
139:13~14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족할 것이다. 다윗은 이제 그분의 능력과 기술에 대한 생각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그가 택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구체적인 측면은 아기가 모태에서 성장하는 놀라운 모습이다. 글자의 한 점보다 더 작은 조그만 액체물질 속에 그 아이의 장래 모든 특성(피부색, 눈과 머리카락 색 깔, 얼굴 형태, 자연적인 재능 등)이 계획되어 있다. 아이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갖추게 될 모든 것이 그 비옥한 수정란 속에 유전자 형태로 들어있다. 그것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형성될 것이다. “관절과 인대와 근육은 말할 것도 없고, 60조개의 세포와 19만 마일의 신경섬유와, 온 몸에 피를 나르는 6만 마일의 혈관과, 250개의 뼈마디와…,” 다윗은 태아의 형성을 아주 정교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주께서 내 장부(inward parts, ‘속 부분’ 혹은 ‘내부의 요소들’)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의 ‘속 부분’을 지으셨다.
139:15
다시금 시편 기자는 그의 몸이 모태에서 형성되던 때를 회상한다. 여기서 그는 태아를 지칭하는데 ‘나’ ‘나의’ ‘나를’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성경적인 견해는, 인간의 인격성은 출생 전에 존재하며, 따라서 의료상 어쩔 수 없는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산(流産)은 살인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를 완전히, 철저히 아셨다는 것을 인식했다. 다윗이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그의 골격, 즉 그의 뼈 구조가 하나님께 숨기우지 못했다. “땅의 깊은 곳”은 지구표면 아래를 가리킬 리 없다. 아무도 거기서 지음 받지 않는다. 문맥으로 보아 그것은 단지 “모태 속”을 의미할 수 있다.
139:16
시편 기자는 그의 “이뤄지지 않은 형질”을 말할 때 함께 둘둘 말아지거나 싸여진 것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했다. 바네스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이 단어가 “몸의 모든 지체가 아직 접혀져 있는 혹은 발전되지 않은, 다시 말해서 그 구별된 형태와 위치를 드러내기 전의” 배아 혹은 태아를 아주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그의 존재의 예비단계에서도 하나님의 눈은 이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를 바라보셨다.
139:17~18(상)
시편 기자는 그의 영과 혼과 몸을 지을 때의 하나님의 주의 깊은 계획을 생각한다. 그분의 생각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그분의 관심이 얼마나 세세한지. 엔드류 아이비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세포가 거의 예외 없이 온 몸의 건강을 위한 계획 내지 목적을 수행하는데 있어 자기가 맡은 역할을 ‘알고 있다.’”
139:18(하)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내가 보기에 시편 기자는 여기서 자신의 출생 순간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앞 단락(13~18절)에서는 출생 전 아홉 달 동안 하나님이 그를 세세히 돌보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출생한 후에도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를 붙들고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여호와와 함께 있다. 우리가 흔히 그 날을 “처음 빛을 보는 날”이라고 일컫듯이 그는 자신의 출생을 “(잠에서) 깨는 것”으로 표현했다.
139:19~22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편재하심과 전능하심을 묵상한 뒤에 시편 기자는 그분에게 감히 등을 돌리는 미미한 인간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징벌은 극히 마땅하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어떤 이들은 19~22절의 다윗의 기도를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논조라고 보고 눈 꼬리를 치켜들 것이다. 시편 기자의 감정은 징벌적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고 그들은 반발할 것이다. 내 견해를 밝히자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거룩과 의로움과 비례하여 강조되어왔다고 믿는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그것 만이 진리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속성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은 그분의 다른 속성을 희생시키고 행사될 수는 없다.
139:23~24
이 시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늘 합당한 기도, 즉 이 땅에 범죄하는 성도가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기도로 마감 된다. 본문은 마음을 철저히 살피고 아실 것과, 생각 혹은 뜻을 주의 깊게 시험하고 아실 것을 능력의 하나님께 구한다. 본문은 모든 악한 행위를 드러내어 자백하고 버릴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그분께 구한다. 그리고 끝으로 영원한 길로 그를 인도해주실 것을 그분께 구한다. 본문은 자신의 무죄함이나 의로움을 항변하는 도전의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여호와의 임재 안에 있고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는 자의 자백이다.
140편: 악인의 손에서 건지소서
140:1~3
다윗은 대적의 비방에서 건짐 받고자 하는 기도로 시작 한다. 악인이 그를 비방하고 강포한 자가 그를 해할 무서운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들은 싸움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음이 즐겁지가 않았다. 그들은 혀를 날카롭게 갈았으며, 입술 아래에서는 치명적인 독이 뿜어져 나왔다.
140:4~5
그러나 시편 기자는 대적의 올무에서도 보호받기를 원했다. 그 악한 자들은 덫을 놓는데 전문가였다. 그들은 그를 올무에 빠뜨릴 계략을 짰다. 그들은 그의 길에 덫을 설치했다. 그들은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할 그물을 놓았다. 그들은 미끼와 유혹물을 길을 따라 걸어 놓았다.
140:6~8
이어서 그는 그들의 살해 계획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갔다.
결심으로-“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간청으로-“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의지함으로-“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감사함으로-“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리우셨나이다.”
간구함으로-“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지 마시며 그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이 마지막 간구는 이런 뜻이다. “악인으로 나를 해하려고 계획한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그것을 허락하심으로 그의 악한 계획의 공범자처럼 되지 마소서.” 우리는 하나님이 악(惡)을 돕거나 부추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요지는 악을 용납하는 것은 그분이 그것을 인정하셨다는 암시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140:9~11
이어서 시편 기자는, 해(害)가 악인 위에 덮이고, 그들이 꾸민 무서운 일이 그들의 교만한 머리 위에 임하고, 타는 숯이 그들 위에 쏟아지고, 그들이 아무 피할 길 없는 웅덩이에 빠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고 강포한 자에게 재앙이 지체 없이 임하게 해달라고 그는 구했다.
140:12~13
이 시는 의로우신 여호와에 대한 조용한 확신으로 마감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다윗은 의(義)가 승리할 것, 즉 여호와께서 고난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 편에 계심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의인은 항상 그분의 도우심으로 인해 여호와께 감사할 이유가 있을 것 이다. 정직한 자는 영원히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할 것이며, 그것이 이 생의 모든 고난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
139편: 하나님은 심히 광대하시다!
“하나님은 심히 광대하시네! 그분이 알지 못하시는 것 없고 그분이 계시지 않는 곳 없고 그분이 할 수 없는 것 없네.” 만일 사람들이 계속해서 그토록 광대하신 하나님의 대적이 된다면, 그들은 멸망 받아 마땅하다. 그것이 이 장려한 시에 나타난 다윗의 묵상의 흐름이다.
139:1~2
먼저 그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으로 시작한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신다. “그분이 알지 못하시는 것 없네. 우주가 무한하고 광대해 보일지라도 그분은 모든 모래알의 영원한 이야기를 아시네.” 그러나 여기서는 개개인의 삶에 대한 그분의 지식을 특별히 염두에 두고 있다. 세계인구는 70억으로 추산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한 사람 한 사람을 친밀히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 모두에 관해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그분은 우리를 감찰하시고 아셨다! 말과 행동, 생각과 동기 등 그 분은 우리를 훤히 아신다.
139:3
그분은 우리가 걸을 때와 누울 때 우리를 살피신다. 다시 말해서 그분은 끊임없이 우리를 지켜 주신다. 우리의 행위 중 아무것도 그분에게 숨기우지 못한다.
139:4
그분은 우리가 말하기 전에 무엇을 말할지를 아신다. 과거와 현재뿐 아니라 미래도 완전히 그분 앞에 열려 있다.
139:5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앞에 벌거벗은 것 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3). 그리고 우리에 대한 그분의 지식이 그토록 완전하므로 그분은 우리의 전후를 지킬 수 있으시다. 항상 그분의 손이 우리를 덮고 보호한다.
139:6
하나님의 무한한 지식은 우리의 이성을 아연케 한다. 그 지식의 무게 아래 우리의 두뇌는 바짝 오그라든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기엔 너무 높다. 그러나 우리의 이해력의 한계에 이르러 더 이상 가지 못할 때, 거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지식의 광대함 앞에 머리 숙여 경배할 수 있다!
139:7~8
하나님은 전능하실 뿐만 아니라 무소부재하시다. 그분은 한번에, 같은 시간에 모든 곳에 계신다. 그러나 하나님의 편재하심은 범신론과 같지 않다. 범신론은 피조물이 하나님이라고 가르친다. 성경은 하나님이 그분의 피조물과 분리되고 구분되는 분이라고 가르친다. 인간이 하나님의 성령을 피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인간이 여호와의 임재를 피하여 숨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인간이 하늘로 올라간다면 거기서 하나님을 피하겠는가? 물론 불가능하다.
139:9~10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할지라도 곧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새벽 날개’는 초당 18만 6천 마일로 동쪽에서 서쪽으로 하늘을 가로질러 비추는 아침 햇살을 가리킨다. 우리가 혹 빛의 속도로 우주의 먼 구석까지 여행할 수 있다해도, 거기서 우리는 우리를 인도하고 붙들기 위해 기다리시는 여호와를 만날 것이다. 우연히도, 9,10절은 우리가 사는 제트 여행시대와 잘 조화를 이룬다.
139:11~12
만일 어떤 사람이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숨길 어두움을 원한다면 그는 헛된 피난처를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밤이 여호와의 임재를 차단할 수는 없다. 어두움은 그분께는 어둡지가 않다.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 하나님은 도저히 피할 수 없다. 파스칼의 말대로 “그분의 중심은 어디에나 있으나, 그분의 원주(圓周)는 어디에도 없다.”
139:13~14
하나님의 편재하심에 대해서는 이 정도로 족할 것이다. 다윗은 이제 그분의 능력과 기술에 대한 생각으로 전환한다. 그리고 그가 택한 하나님의 전능하심의 구체적인 측면은 아기가 모태에서 성장하는 놀라운 모습이다. 글자의 한 점보다 더 작은 조그만 액체물질 속에 그 아이의 장래 모든 특성(피부색, 눈과 머리카락 색 깔, 얼굴 형태, 자연적인 재능 등)이 계획되어 있다. 아이가 육체적 정신적으로 갖추게 될 모든 것이 그 비옥한 수정란 속에 유전자 형태로 들어있다. 그것에서 다음과 같은 것들이 형성될 것이다. “관절과 인대와 근육은 말할 것도 없고, 60조개의 세포와 19만 마일의 신경섬유와, 온 몸에 피를 나르는 6만 마일의 혈관과, 250개의 뼈마디와…,” 다윗은 태아의 형성을 아주 정교하고 아름답게 묘사하고 있다. “주께서 내 장부(inward parts, ‘속 부분’ 혹은 ‘내부의 요소들’)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의 ‘속 부분’을 지으셨다.
139:15
다시금 시편 기자는 그의 몸이 모태에서 형성되던 때를 회상한다. 여기서 그는 태아를 지칭하는데 ‘나’ ‘나의’ ‘나를’이라는 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음을 주목하라. 성경적인 견해는, 인간의 인격성은 출생 전에 존재하며, 따라서 의료상 어쩔 수 없는 극단적인 경우를 제외하고는 유산(流産)은 살인이라는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를 완전히, 철저히 아셨다는 것을 인식했다. 다윗이 은밀한데서 지음을 받고 땅의 깊은 곳에서 기이하게 지음을 받은 때에 그의 골격, 즉 그의 뼈 구조가 하나님께 숨기우지 못했다. “땅의 깊은 곳”은 지구표면 아래를 가리킬 리 없다. 아무도 거기서 지음 받지 않는다. 문맥으로 보아 그것은 단지 “모태 속”을 의미할 수 있다.
139:16
시편 기자는 그의 “이뤄지지 않은 형질”을 말할 때 함께 둘둘 말아지거나 싸여진 것을 의미하는 단어를 사용했다. 바네스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이 단어가 “몸의 모든 지체가 아직 접혀져 있는 혹은 발전되지 않은, 다시 말해서 그 구별된 형태와 위치를 드러내기 전의” 배아 혹은 태아를 아주 적절히 묘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그의 존재의 예비단계에서도 하나님의 눈은 이 이스라엘의 노래 잘 하는 자를 바라보셨다.
139:17~18(상)
시편 기자는 그의 영과 혼과 몸을 지을 때의 하나님의 주의 깊은 계획을 생각한다. 그분의 생각이 얼마나 보배로운지. 그분의 관심이 얼마나 세세한지. 엔드류 아이비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세포가 거의 예외 없이 온 몸의 건강을 위한 계획 내지 목적을 수행하는데 있어 자기가 맡은 역할을 ‘알고 있다.’”
139:18(하)
“내가 깰 때에도 오히려 주와 함께 있나이다.” 내가 보기에 시편 기자는 여기서 자신의 출생 순간을 가리키고 있는 듯하다. 앞 단락(13~18절)에서는 출생 전 아홉 달 동안 하나님이 그를 세세히 돌보신 것을 강조했다. 그러나 그가 출생한 후에도 상황이 변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그를 붙들고 보호하고 인도하시는 여호와와 함께 있다. 우리가 흔히 그 날을 “처음 빛을 보는 날”이라고 일컫듯이 그는 자신의 출생을 “(잠에서) 깨는 것”으로 표현했다.
139:19~22
하나님의 전지하심과 편재하심과 전능하심을 묵상한 뒤에 시편 기자는 그분에게 감히 등을 돌리는 미미한 인간들을 생각하며 그들의 징벌은 극히 마땅하다고 결론지었다. 물론 어떤 이들은 19~22절의 다윗의 기도를 그리스도인답지 않은 논조라고 보고 눈 꼬리를 치켜들 것이다. 시편 기자의 감정은 징벌적이며,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양립할 수 없다고 그들은 반발할 것이다. 내 견해를 밝히자면, 하나님의 사랑은 그분의 거룩과 의로움과 비례하여 강조되어왔다고 믿는다. 물론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러나 그것 만이 진리의 전부는 아니다. 그것은 그분의 속성 중 하나일 뿐이다. 그리고 그분의 사랑은 그분의 다른 속성을 희생시키고 행사될 수는 없다.
139:23~24
이 시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늘 합당한 기도, 즉 이 땅에 범죄하는 성도가 있는 한 결코 사라지지 않을 기도로 마감 된다. 본문은 마음을 철저히 살피고 아실 것과, 생각 혹은 뜻을 주의 깊게 시험하고 아실 것을 능력의 하나님께 구한다. 본문은 모든 악한 행위를 드러내어 자백하고 버릴 수 있게 해 주실 것을 그분께 구한다. 그리고 끝으로 영원한 길로 그를 인도해주실 것을 그분께 구한다. 본문은 자신의 무죄함이나 의로움을 항변하는 도전의 말이 아니다. 그보다는 여호와의 임재 안에 있고 자신의 죄악됨을 깨닫는 자의 자백이다.
140편: 악인의 손에서 건지소서
140:1~3
다윗은 대적의 비방에서 건짐 받고자 하는 기도로 시작 한다. 악인이 그를 비방하고 강포한 자가 그를 해할 무서운 계획을 꾸미고 있었다. 그들은 싸움을 일으키지 않으면 마음이 즐겁지가 않았다. 그들은 혀를 날카롭게 갈았으며, 입술 아래에서는 치명적인 독이 뿜어져 나왔다.
140:4~5
그러나 시편 기자는 대적의 올무에서도 보호받기를 원했다. 그 악한 자들은 덫을 놓는데 전문가였다. 그들은 그를 올무에 빠뜨릴 계략을 짰다. 그들은 그의 길에 덫을 설치했다. 그들은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할 그물을 놓았다. 그들은 미끼와 유혹물을 길을 따라 걸어 놓았다.
140:6~8
이어서 그는 그들의 살해 계획으로부터 보호받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가까이 갔다.
결심으로-“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간청으로-“나의 간구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소서.”
의지함으로-“내 구원의 능력이신 주 여호와여.”
감사함으로-“전쟁의 날에 주께서 내 머리를 가리우셨나이다.”
간구함으로-“여호와여 악인의 소원을 허락지 마시며 그 악한 꾀를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이 마지막 간구는 이런 뜻이다. “악인으로 나를 해하려고 계획한 일을 이루지 못하게 하소서. 그것을 허락하심으로 그의 악한 계획의 공범자처럼 되지 마소서.” 우리는 하나님이 악(惡)을 돕거나 부추기지 않으신다는 것을 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요지는 악을 용납하는 것은 그분이 그것을 인정하셨다는 암시로 보일 수 있다는 것이다.
140:9~11
이어서 시편 기자는, 해(害)가 악인 위에 덮이고, 그들이 꾸민 무서운 일이 그들의 교만한 머리 위에 임하고, 타는 숯이 그들 위에 쏟아지고, 그들이 아무 피할 길 없는 웅덩이에 빠지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악담하는 자는 세상에서 굳게 서지 못하고 강포한 자에게 재앙이 지체 없이 임하게 해달라고 그는 구했다.
140:12~13
이 시는 의로우신 여호와에 대한 조용한 확신으로 마감된다. 어떤 일이 일어나든 다윗은 의(義)가 승리할 것, 즉 여호와께서 고난당하는 자와 궁핍한 자 편에 계심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의인은 항상 그분의 도우심으로 인해 여호와께 감사할 이유가 있을 것 이다. 정직한 자는 영원히 그분의 임재 안에 거할 것이며, 그것이 이 생의 모든 고난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게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