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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매일성경연구 시편 1-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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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4월 01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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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연구 시편 1-2편입니다

시편 서론

 “진실로 나는 이 책을 영혼의 모든 부분의 해부도라 부르고 싶다. 왜냐 하면 이 거울에 투영되지 않은 마음의 파동을 느낄 사람은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슬픔, 곤경, 두려움, 의심, 소망, 고통, 혼돈, 감정 폭발 등 인간의 마음에 파장을 일으키는 모든 요소들이 여기에 아주 생생히 묘사 되어 있다.”(존 캘빈)

1. 정경상의 독특한 위치
만일 당신이 성경 중 한 권만 갖고 황량한 섬에 갇히게 된다면 어떤 책을 택하겠는가? 솔직히 말해서 그러한 선택을 할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나, 부득불 선택해야 한다면 나는 시편을 택할 것 같다! 그 주제의 범위가 방대하고 그 열거된 삶의 경험들이 풍부하고 그 예배가 극히 장려하게 묘사되어 있기에 나는 앞으로 오랜 시간 동안 풍성한 영의 양식과 찬양과 기도에 필요한 뛰어난 효력의 연료를 공급받게 될 것이다. 서두의 인용문으로 보아 아마 캘빈도 시편을 택했을 것이다. 그레헴 스크로기도 아마 시편 쪽으로 표를 던졌을 텐데, 그는 이 렇게 표현했다. “이 시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향한 찬양으로 가득한지! 창조, 섭리, 구속 등 모든 주제들에 우리의 영혼은 온통 사로잡히고 만다. 하늘과 땅, 바다와 창공, 생물과 무생물이 다 여호와를 찬양하도록 부름 받는다.”

처음 시편을 상고할 때는 몇몇 시편들에서 생각의 일정한 흐름을 파악하지 못해 종종 좌절을 경험한다. 논리의 흐름이 때로는 산만하고 때로는 가려지고 때로는 완전히 사라지는 듯 보인다. 알버트 바네스와 C. S. 루이스의 다음 두 설명이 도움이 될 것이다. “시편은 대부분이 서정시(抒情詩), 즉 하프나 수금 가락에 맞춰진 시로서, 악기에 맞춰 사용되며, 읽혀지기 위한 것이 아닌 노래로 불려지기 위한 것이다.”
“시편은 반드시 시로, 즉 모든 파격(破格)과 모든 형식과 과장법과 논리적이 아닌 감정적인 연결고리를 지닌 서정시로 읽혀져야 한다.” 이러한 통찰은 전혀 새로운 이해의 창을 우리에게 열어줄 수 있다.

2. 기자 시편은 종종 “다윗의 시”로 불리어지나 그러나 절반 정도만(73 편) 그 “이스라엘의 노래 잘하는 자”의 것으로 직접 돌려진다. 12편은 아삽의 것이며, 10편은 고라 자손의 것이며, 2편은 솔로몬, 그리 고 모세, 에단, 허만, 에스라 등에게 1편씩 돌아간다. 49편, 혹은 약 3분의 1이 기자익명이다. 그러나 시편을 생각할 때 우리는 보통 다윗의 생애와 관련하여 생각한다. 한 이름 없는 작가는 이 사실을 이렇게 아름답게 묘사한다. “다윗의 하프 소리가 여전히 우리 귓전에 울리며, 성령께서 우리를 위해 이새의 아들의 기도와 찬양을 이렇게 한데 모으셨다. 시편은 마음의 음악이다. 때로는 애처롭고 슬프고, 때로는 어두움과 번뇌로 가득하고, 때로는 기쁘고 즐겁고, 때로는 평온하고 행복한 다윗의 영혼의 음악으로서, 그 소리를 듣는 우리로 하나님께 가까이 나가도록 격려를 받도록 성령에 의해 보존된 것이다.”

3.시편 개관

1.     제1권(시 1~41편)

2.     제2권(시 42~72편)

3.     제3권(시 73~89편)

4.     제4권(시 90~106편)

5.     제5권(시 107~150편)

 
제1권(시 1~41편)

1편 : 행복한 삶

시편은 죄악된 삶이 행복한 삶이라는 일반적인 환상을 제거하면서 시작한다. 날마다 세상은, 참되고 지속적인 만족은 육체의 정욕에 탐닉함으로 발견된다는 생각 속에 세뇌당하고 있다. 텔레비전, 라디오, 영화, 잡지 등 모든 것이 한결같이 만족에 이르는 길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permissiveness)이라고 제안한다. 순결한 삶은 “청교도적인 것”으로 거부된다. 그러나 시편 기자는 그런 잘 못된 생각을 바로잡고 있다.

1:1
진실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삶의 방식을 멀리하는 사람이다. 그는 악인과 접촉할 때 그들과 연루되기를 피하며 그들의 죄와 비웃음을 묵인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복 있는 사람은 악인에게서 자신을 완전히 격리시킨다는 뜻은 아니다. 그 대신 그는 그들에게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증거하며, 그들을 그리스도께, 즉 영원한 기쁨의 유일한 근원 되신 분께 인도하기 위해 힘쓴다. 복 있는 사람은 악인의 진정한 친구이지만, 악인과 한 부류는 아니다.

1:2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지 않는 복 있는 사람이란 상상이 불가능하다. 그는 여호와의 말씀에 대한 만족을 모르는 갈망을 소유한다. 그는 성경을 사랑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한다. 그것을 통해 그의 삶이 풍성해지며, 그는 다른 사람에게 축복의 통로가 된다.

1:3
죄를 멀리하고 성경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강하고 건강하고 결실이 풍부한 나무의 모든 특질을 소유한다. ‘물가에 심겨졌다―그는 양분과 생기를 끊임없이 공급받는다. 시절을  쫒아 과실을 맺는다―그는 성령의 은혜를 드러내며, 그 언행심사가 항상 때에 맞고 적절하다.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않는다―그의 영적인 삶은 주기적인 변화를 거듭하지 않으며, 지속적인 내적인 소생함으로 특징지어진다. D. L. 무디의 표현대로 “여호와의 모든 나무는 항상 푸르다.”‘ 이러한 류의 사람은 그가 하는 모든 일에 형통할 것이다. 물론 그 이유는, 그가 여호와와 사귐 가운데 거하고, 따라서 그 모든 일이 성령의 인도를 받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열매와 성공을 거두는 유일한 길은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 것이다. 자아의 지 배를 받는 활동은 시간과 돈과 정력을 크게 낭비하게 한다.

1:4
악인은 그렇지 않다. 즉 그들은 잘 심겨지지도 못하고 결실하지도 못하고 견디지도 못하고 형통하지도 못한다. 겨와 같이 그들은 알갱이나 실체가 결여되어 있다. 삶의 폭풍이 불어올 때 그들은 불안한 모습을 드러낸다. 강풍이 그들을 쫓아낸다.

 1:5
악인은 심판을 견디지 못한다. 물론 그들은 크고 흰 보좌의 심판 때에 하나님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의 의미는 그  (1:3) “심다”로 번역된 단어인 샤툴(shatul)은 문자적으로 ‘옮겨 심다’를 뜻하며(Koehler-Baumgartner, ‘Lexicon in Veteris Testamenti Libros’, p. 1015), 이는 거듭난 사람에 대한 적절한 표현이다.

1:6
이 모든 일이 그렇게 되는 이유는 무엇인가? 여호와께서는 의인의 길을 인정하신다. 그분은 그들의 삶을 아실 뿐 아니라 그들을 또한 인정하신다. 이 얼마나 죄악된 삶의 종말(영원한 죽음!)과 대조되는가! 그러나 사람의 운명이 그 삶의 방식에 의해 결정되지 않는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결정적인 요소는 그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거듭났느냐 하는 것이다. 의인은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개인적인 구주로 영접한 사람이다. 그의 의로운 삶은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소유한 새로운 생명의 결과이다. 악인은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주 예수 님께 무릎꿇기를 거절한 사람이다. 그는 구주를 소유하는 대신 자신의 죄를 그대로 소유하며, 그로써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인친다.

 시편 2편 :
이 시를 제 위치에 두려면 대환란이 끝나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런 재림과 통치 직전의 시점을 바라보아야 한다. 그 때는 열왕과 열방의 거대한 연합체가 그리스도께서 세계통치권을 취하시는 것을 제지하려는 단호한 결의로 한데 뭉칠 것이다.
사도행전 4:25~28에서 베드로와 바울은 시편 2편을 그리스도의 부활과 관련시켰다. 물론 본문은 헤롯, 본디오 빌라도, 이방인, 이스라엘 백성이 그리스도를 죽이기 위해 연합했을 때 부분적으로 성취되었다. 그러나 그 마지막 성취는 여전히 미래에 있다.

 2:1~3
그러나 그런 연합체는 나약한 시도임을 드러낼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물었다. “어찌하여 이방 민족들과 유대 백성이 그런 가능성 없는 모의를 꾀하는가? 어떻게 이방 열왕과 유대 방백들이 여호와와 그 기름부음 받은 자의 권위에 반역하는데 성공하겠 는가?”

 2:4~6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그들의 어리석은 오만함을 비웃으실 것이다. 그분이 그들의 불끈 쥔 주먹과 광포한 부르짖음을 조롱하실 것이다. 그들의 자랑과 위협은 사자 앞에서 쥐가 찍찍거리는 격이다! 마침내 하나님이 침묵을 깨실 것이다. 그분이 말씀하실 때 그 진노와 맹렬함에 놀라 그 대적이 두려워 떨 것이다. 그들은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는 변개할 수 없는 그분의 결정을 듣게 될 것이다. 일단 하나님이 그러한 결정을 선포하시면 그 성취는 이미 이뤄진 것처럼 확실한 법이다.

2:7
이어서 그리스도께서 친히 증거를 더하실 것이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둘 사이의 대화에서 먼저 자기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라고 말씀하셨음을 드러낼 것이다. 이 선언은 적어도 네 가지로 이해될 수 있다. 첫째로, 그리스도께서 영원 부터 하나님의 아들이셨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나 사도행전 13:33 에서 이 구절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인용되었다. 또 다른 의미로 그리스도는 부활을 통해 태어나셨다-“죽은 자 가운데서 먼저 나신 자”(골 1:18). 그리고 끝으로, “오늘날”은 그리 스도께서 왕위에 오르실 미래의 날을 가리킨다고 어떤 이들은 주장 한다.

2:8
그러나 아버지께서도 덧붙여 말씀하셨다. “내게 구하라. 내가 열방을 유업으로 주리니 네 소유가 땅끝까지 이르리로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에게 우주적인 지배권을 약속하신 것이다. 온 땅이 그분의 권위에 복종할 것이며, 그분의 통치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미칠 것이다.

 2:9
마침내, 하나님은 모든 복종치 않는 것과 거스르는 것을 다스릴 권위를 그리스도께 부여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을 거슬려 일어나는 자들을 철장으로 깨뜨리고 질그릇같이 부술 것이다. 다른 성경에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 재림하실 때와 천년통치 동안에 그러한 권위를 행사하실 것임을 알게 된다. 왕위에 오르기 전에 그분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복음을 복종치 않는 자들을 멸하실 것이다. 그런 다음 천년왕국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철장으로 다스리며 오만한 머리를 드는 일체의 반역을 징벌하실 것이다.

2:10~11
성령의 음성이 다시 들린다. 감동적인 구령의 호소를 통해서 그분은 열왕과 방백들에게 여호와를 사랑하고 섬길 것을 촉구하셨다. 그분을 거절하는 것은 멸망을 의미하지만, 그분을 믿는 것은 안전과 참된 행복을 가져온다.

2:12
인간이 자신의 창조주를 믿는 것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건전하고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일이다. 반면에, 전능자를 불신하고 거역하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불합리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