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공부 매일성경연구 시편 5-6편
페이지 정보
작성일 04월 06일 2021년본문
시편 5-6편 연구
5편은 다윗이 의인과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대조적인 태도를 묵상하고 있는 아침 기도이다.
5:1~2
먼저 그는 그의 말을 들으실 뿐 아니라 그의 심사(묵상) 도 감찰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한다. 그것은 가치 있는 요청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말처럼 쉽게 우리의 묵상을 해석 하실 수 있다. 시편 기자는 그의 묵상을 들으실 뿐 아니라 그의 부르짖는 소리도 들으시도록 하나님께 구한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단순한 말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목소리의 억양과 깊이와 열정을 암시한다. 여호와를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다윗은 그가 여호와와 더불어 누리는 다정하고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드러낸 다.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라는 표현에서 그는 참되신 하나님이 그가 기도하는 유일한 대상임을 보여준다-“당신께, 오직 당신께.” 그 관계는 소유적인 것일 뿐 아니라 배타적인 것이었다.
5:3
다윗의 기도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정기적인 것이었다. 매일 아침 여호와께서 그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매일 아침이 하나님의 사람은 찬양과 기도의 단을 쌓고, 그날을 보내는 동안 여호와께서 그 자신을 계시해주실 것을 기다렸다. 너무도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한다. “우리는 부두에 서서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쉬 지치는 까닭에 많은 응답들을 놓쳐버린다”라고 F. B. 메이어는 말했다.
5:4~6
다윗은 늘 대적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기억함으로써 그 기도의 확신이 견고해졌다. 신자들은 그 안에 은혜의 보좌에 이르는 길이 있다. 경건치 않은 자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모든 형태의 악행을 기뻐할 수 없으시다. 악은 그의 밤손님이 될 수 없다. 오만한 자들은 이 왕 앞에서는 은총을 입을 수 없다. 그분은 모든 행악자들을 미워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미워할 수 없으시다는 널리 퍼진 이야기를 무효화시키는 진리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모든 거짓말쟁이를 징벌하고 모든 살인자와 속이는 자를 증오할 것을 요구한다.
5:7
죄악된 대적들과 대조적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자비 혹은 은혜의 풍성함을 쫒아 여호와의 존전에 즉각 들어갔다. 그는 모든 경건한 유대인이 그렇듯이 깊은 경외심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했다. 실제 성전은 다윗이 죽은 후에 세워졌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성막을 가리킴이 분명하다(삼상 1:9; 3:3; 삼하 22:7).
5:8
다윗은 대적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기에, 주변의 위험에서 안전히 그를 인도하고 그의 길을 선명히 밝혀줌으로써 그분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달라고 여호와께 구했다.
5:9
이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그 의로운 종을 변호하고 악한 대적을 징벌하실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들이 하는 말은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의 내면 세계, 즉 그 생각과 동기는 완전히 부패하고 악하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아서 썩은 냄새를 풍기며 언제든 희생물을 삼키려 한다. 그들은 상습적이며 신실치 못한 아첨꾼들이다.
5:10
그들의 운명은 정당하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담당하도록 되어 있다. 그들의 악한 계략은 그들 자신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그들의 무수한 불의가 그들을 쫓아낼 것을 요구한다. 그들의 으뜸 되는 죄는 여호와 하나님께 반역했다는 것이다.
5:11~12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대적을 감찰하고 계시는 한, 그분 편에 선자들은 기뻐할 이유가 항상 있으며, 그분이 그들의 강하고 견고한 피난처가 되심을 발견하고 기뻐 외친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은 그들의 변치 않는 보호자 되신 그분을 높일 것이다! 그에 대해선 아무 의문이 없다. 하나님은 의인을 사랑하시며, 그를 방패로 보호하듯이 은혜로 두르실 것이다.
6편 :
이중의 환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나, 다윗은 대적의 극심한 압박으로 인해 슬픔이 가중되었다. 아마 그들은 그의 절망적인 상태를 고소한 듯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6:1
다윗은 자신의 질병을 어떤 죄 때문에 임한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종종 우리 마음에 그런 생각이 먼저 스쳐가곤 한다. 그리고 그런 진단은 때로 옳다. 어떤 질병은 신자의 삶에 자백되지 않은 죄 때문에 오기도 한다(고전 11:30).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종종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발판으로(요 9:3; 11:4), 혹은 영적인 열매를 거두기 위한 수단으로(롬 5:3), 혹은 죄를 예방 하기 위해(고후 12:7), 혹은 과로(過勞)의 자연스런 결과로(빌 2:30), 혹은 연로함으로(전 12:3~6) 질병을 허락하신다. 질병이 찾아올 때 우리가 보여야 할 첫 번째 반응은 우리의 삶에 자백되지 않은 죄가 없는지 살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여호와께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고 우리를 고쳐주실 것을 구해야 한다. 그 다음엔 의사에게 찾아가 약을 복용하는 것이 적절한데,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이 아닌 여호와 자신을 의뢰하도록 주의해야 한다(대하 16:12). 모든 치유는 기적적이든 일상적이든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 만일 어떤 특별한 경우에 그분이 고쳐주시지 않는다면, 그분은 고난이나 혹은 죽음을 감당할 은혜를 주실 것이다. 일반적으로 죽음에 필요한 은혜는 그것을 필요로 할 때 비로소 주어진다.
6:2~3
시편 기자는 육성으로, 아주 또렷또렷하게, 치유를 호소했다. 그는 힘이 소진했다. 그의 뼈가 계속해서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의 내면 세계 전체도-감정과 지성과 의지-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반응이 더딘 것처럼 보였다. 어느 때야 그분이 고난당하는 자를 은혜로이 고치시겠는가?
6:4
다윗은 무관심한 태도로 보이는데서 돌이켜 그의 생명을 질병과 죽음에서 건져달라고 여호와께 구했다. 그가 불행에서 건져달라고 구하는 유일한 근거는 여호와의 변함 없는 자비이다.
6:5
이어서 치유를 위한 특이한 논증, 즉 만일 다윗이 죽으면 하나님께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가 살아있는 한 여호와를 기억하고 찬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죽으면 하나님이 잊혀질 것이다. 영혼 없는 몸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을 것이 다. 이런 논증은 육체에 관한한 어느 정도 유효한데, 왜냐하면 죽은 몸은 기억도 찬양할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과 혼에 관한 한, 이 논증은 구약 성도들이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해 지녔던 제한된 지식을 반영한다.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온전한 계시 덕택에 이제 우리는, 신자는 죽을 때 훨씬 더 좋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을 위해 그 땅에 속한 몸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빌 1:23). 그는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편히 쉰다(고후 5:8). 요컨대, 신자는 영혼이 잠자는 대기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존전에 의식적인 상태로 거하면서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다윗은 그가 받은 빛을 훌륭히 사용하여 기도에 잘 적용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우리가 소유한 더 뛰어난 빛을 잘 사용한다면 얼마나 훌륭한 찬양과 간구가 올려질 수 있겠는가!
6:6~7
우리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그의 묘사를 통해 시편 기자가 처한 환란의 정도를 얼마간 헤아릴 수 있다. 그는 탄식과 신음 중에 탈진했다. 그는 밤마다 눈물로 침상과 요를 적셨다. 그의 눈은 깊은 슬픔으로 푹 패였고, 그의 시력은 모든 대적의 압박 때문에 쇠하였다. 그의 삶은 환란으로 넘쳤고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보였다.
6:8~10
그러나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킨다. 은밀하고 기이한 성령의 교통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의 탄식소리를 들으셨고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확신이 그에게 생겼다. 그는 그런 확신에 힘을 얻어 대적에게 떠나가라고 명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징벌하려고 일어나실 때 그들은 갑작스레 부끄러운 패배를 당할 것임을 알기에, 그는 더 이상 그들의 위협에 움츠러들지 않는다. “오 주님, 주의 존전에서 보낸 한 시간이 우리 속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는지! 얼마나 무거운 마음의 짐을 가져가는지! 얼마나 메마른 땅에 소나기와 같은 생기를 불어넣는지! 우리가 무릎꿇을 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낮아지는 듯 하고 우리가 일어날 때 멀고 가까운 모든 것이 밝은 햇살 아래 당당하고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네. 우리가 무릎꿇을 때 얼마나 약한 존재이며 우리가 일어날 때 얼마나 능력이 충만한지! 이 일을 어찌 그릇 하리요. 우리 홀로 기도하면 강하지 못하고 때로 걱정에 압도되고 늘 나약하고 상심하고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주와 더불어 기도하면 기쁨과 능력과 용기가 솟아나네 " (리차드 체네빅스 트렌취).
5편은 다윗이 의인과 악인을 향한 하나님의 대조적인 태도를 묵상하고 있는 아침 기도이다.
5:1~2
먼저 그는 그의 말을 들으실 뿐 아니라 그의 심사(묵상) 도 감찰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구한다. 그것은 가치 있는 요청이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말처럼 쉽게 우리의 묵상을 해석 하실 수 있다. 시편 기자는 그의 묵상을 들으실 뿐 아니라 그의 부르짖는 소리도 들으시도록 하나님께 구한다. 부르짖는다는 것은 단순한 말 이상을 의미한다. 그것은 목소리의 억양과 깊이와 열정을 암시한다. 여호와를 “나의 왕 나의 하나님”이라고 부르면서 다윗은 그가 여호와와 더불어 누리는 다정하고 개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드러낸 다. “내가 주께 기도하나이다”라는 표현에서 그는 참되신 하나님이 그가 기도하는 유일한 대상임을 보여준다-“당신께, 오직 당신께.” 그 관계는 소유적인 것일 뿐 아니라 배타적인 것이었다.
5:3
다윗의 기도는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정기적인 것이었다. 매일 아침 여호와께서 그의 목소리를 들으셨다. 매일 아침이 하나님의 사람은 찬양과 기도의 단을 쌓고, 그날을 보내는 동안 여호와께서 그 자신을 계시해주실 것을 기다렸다. 너무도 종종 우리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지 못한다. “우리는 부두에 서서 배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는데 쉬 지치는 까닭에 많은 응답들을 놓쳐버린다”라고 F. B. 메이어는 말했다.
5:4~6
다윗은 늘 대적을 의식하고 있었으며,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의로우심을 기억함으로써 그 기도의 확신이 견고해졌다. 신자들은 그 안에 은혜의 보좌에 이르는 길이 있다. 경건치 않은 자들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모든 형태의 악행을 기뻐할 수 없으시다. 악은 그의 밤손님이 될 수 없다. 오만한 자들은 이 왕 앞에서는 은총을 입을 수 없다. 그분은 모든 행악자들을 미워하신다. 그것은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미워할 수 없으시다는 널리 퍼진 이야기를 무효화시키는 진리이다! 하나님의 거룩하심은 모든 거짓말쟁이를 징벌하고 모든 살인자와 속이는 자를 증오할 것을 요구한다.
5:7
죄악된 대적들과 대조적으로 다윗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자비 혹은 은혜의 풍성함을 쫒아 여호와의 존전에 즉각 들어갔다. 그는 모든 경건한 유대인이 그렇듯이 깊은 경외심으로 성전을 향하여 경배했다. 실제 성전은 다윗이 죽은 후에 세워졌으므로 여기서 말하는 성전은 성막을 가리킴이 분명하다(삼상 1:9; 3:3; 삼하 22:7).
5:8
다윗은 대적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있기에, 주변의 위험에서 안전히 그를 인도하고 그의 길을 선명히 밝혀줌으로써 그분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달라고 여호와께 구했다.
5:9
이어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그 의로운 종을 변호하고 악한 대적을 징벌하실 수밖에 없는 분명한 이유를 제시한다. 그들이 하는 말은 믿을 수가 없다. 그들의 내면 세계, 즉 그 생각과 동기는 완전히 부패하고 악하다. 그들의 목구멍은 열린 무덤과 같아서 썩은 냄새를 풍기며 언제든 희생물을 삼키려 한다. 그들은 상습적이며 신실치 못한 아첨꾼들이다.
5:10
그들의 운명은 정당하다. 그들은 그들의 죄를 담당하도록 되어 있다. 그들의 악한 계략은 그들 자신에게 돌아가도록 되어 있다. 그들의 무수한 불의가 그들을 쫓아낼 것을 요구한다. 그들의 으뜸 되는 죄는 여호와 하나님께 반역했다는 것이다.
5:11~12
그러나 하나님이 그분의 대적을 감찰하고 계시는 한, 그분 편에 선자들은 기뻐할 이유가 항상 있으며, 그분이 그들의 강하고 견고한 피난처가 되심을 발견하고 기뻐 외친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모든 자들은 그들의 변치 않는 보호자 되신 그분을 높일 것이다! 그에 대해선 아무 의문이 없다. 하나님은 의인을 사랑하시며, 그를 방패로 보호하듯이 은혜로 두르실 것이다.
6편 :
이중의 환란,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것도 괴로운 일이나, 다윗은 대적의 극심한 압박으로 인해 슬픔이 가중되었다. 아마 그들은 그의 절망적인 상태를 고소한 듯 바라보고 있었을 것이다.
6:1
다윗은 자신의 질병을 어떤 죄 때문에 임한 하나님의 징계의 채찍으로 이해했다. 우리는 흔히 그렇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데, 종종 우리 마음에 그런 생각이 먼저 스쳐가곤 한다. 그리고 그런 진단은 때로 옳다. 어떤 질병은 신자의 삶에 자백되지 않은 죄 때문에 오기도 한다(고전 11:30). 그러나 항상 그런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종종 자신의 능력과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발판으로(요 9:3; 11:4), 혹은 영적인 열매를 거두기 위한 수단으로(롬 5:3), 혹은 죄를 예방 하기 위해(고후 12:7), 혹은 과로(過勞)의 자연스런 결과로(빌 2:30), 혹은 연로함으로(전 12:3~6) 질병을 허락하신다. 질병이 찾아올 때 우리가 보여야 할 첫 번째 반응은 우리의 삶에 자백되지 않은 죄가 없는지 살피는 것이다. 그런 다음 우리는 여호와께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고 우리를 고쳐주실 것을 구해야 한다. 그 다음엔 의사에게 찾아가 약을 복용하는 것이 적절한데, 그러나 여호와께서 사용하시는 수단이 아닌 여호와 자신을 의뢰하도록 주의해야 한다(대하 16:12). 모든 치유는 기적적이든 일상적이든 여호와께로 말미암는다. 만일 어떤 특별한 경우에 그분이 고쳐주시지 않는다면, 그분은 고난이나 혹은 죽음을 감당할 은혜를 주실 것이다. 일반적으로 죽음에 필요한 은혜는 그것을 필요로 할 때 비로소 주어진다.
6:2~3
시편 기자는 육성으로, 아주 또렷또렷하게, 치유를 호소했다. 그는 힘이 소진했다. 그의 뼈가 계속해서 그를 고통스럽게 했다. 그의 내면 세계 전체도-감정과 지성과 의지-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반응이 더딘 것처럼 보였다. 어느 때야 그분이 고난당하는 자를 은혜로이 고치시겠는가?
6:4
다윗은 무관심한 태도로 보이는데서 돌이켜 그의 생명을 질병과 죽음에서 건져달라고 여호와께 구했다. 그가 불행에서 건져달라고 구하는 유일한 근거는 여호와의 변함 없는 자비이다.
6:5
이어서 치유를 위한 특이한 논증, 즉 만일 다윗이 죽으면 하나님께 아무 유익이 없을 것이라는 주장을 내세웠다. 그가 살아있는 한 여호와를 기억하고 찬양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죽으면 하나님이 잊혀질 것이다. 영혼 없는 몸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없을 것이 다. 이런 논증은 육체에 관한한 어느 정도 유효한데, 왜냐하면 죽은 몸은 기억도 찬양할 능력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과 혼에 관한 한, 이 논증은 구약 성도들이 죽음 너머의 삶에 대해 지녔던 제한된 지식을 반영한다. 그리스도께서 허락하신 온전한 계시 덕택에 이제 우리는, 신자는 죽을 때 훨씬 더 좋은, 그리스도와 함께 거하는 것을 위해 그 땅에 속한 몸을 떠난다는 것을 알고 있다(빌 1:23). 그는 몸을 떠나 주님과 함께 편히 쉰다(고후 5:8). 요컨대, 신자는 영혼이 잠자는 대기실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 존전에 의식적인 상태로 거하면서 그분을 찬양하고 경배를 드리는 것이다. 다윗은 그가 받은 빛을 훌륭히 사용하여 기도에 잘 적용시켰다고 말할 수 있다. 만일 우리의 기도가 우리가 소유한 더 뛰어난 빛을 잘 사용한다면 얼마나 훌륭한 찬양과 간구가 올려질 수 있겠는가!
6:6~7
우리는 자신의 상태에 대한 그의 묘사를 통해 시편 기자가 처한 환란의 정도를 얼마간 헤아릴 수 있다. 그는 탄식과 신음 중에 탈진했다. 그는 밤마다 눈물로 침상과 요를 적셨다. 그의 눈은 깊은 슬픔으로 푹 패였고, 그의 시력은 모든 대적의 압박 때문에 쇠하였다. 그의 삶은 환란으로 넘쳤고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보였다.
6:8~10
그러나 기도는 상황을 변화시킨다. 은밀하고 기이한 성령의 교통으로 말미암아, 여호와께서 그의 탄식소리를 들으셨고 그의 기도가 응답되었다는 확신이 그에게 생겼다. 그는 그런 확신에 힘을 얻어 대적에게 떠나가라고 명한다. 여호와께서 그들을 징벌하려고 일어나실 때 그들은 갑작스레 부끄러운 패배를 당할 것임을 알기에, 그는 더 이상 그들의 위협에 움츠러들지 않는다. “오 주님, 주의 존전에서 보낸 한 시간이 우리 속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를 가져오는지! 얼마나 무거운 마음의 짐을 가져가는지! 얼마나 메마른 땅에 소나기와 같은 생기를 불어넣는지! 우리가 무릎꿇을 때 우리를 둘러싼 모든 것이 낮아지는 듯 하고 우리가 일어날 때 멀고 가까운 모든 것이 밝은 햇살 아래 당당하고 뚜렷이 모습을 드러내네. 우리가 무릎꿇을 때 얼마나 약한 존재이며 우리가 일어날 때 얼마나 능력이 충만한지! 이 일을 어찌 그릇 하리요. 우리 홀로 기도하면 강하지 못하고 때로 걱정에 압도되고 늘 나약하고 상심하고 염려하고 근심하지만 주와 더불어 기도하면 기쁨과 능력과 용기가 솟아나네 " (리차드 체네빅스 트렌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