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연구 시편 15-16편 > 교회학교

본문 바로가기

교회학교

매일성경공부 매일성경연구 시편 15-16편

페이지 정보

작성일 04월 12일 2021년

본문

시편 15-16편  연구

15편 : 하나님이 택하시는 사람

15:1
하나님이 그 친구로 택하시는 자가 누구인가가 15편의 주제 이다. 이 시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한 기본 자격은 거듭나는 것이다. 새로운 출생 없이는 아무도 그 나라를 보거나 들어갈 수 없다. 그 위로부터 나는 출생은 은혜에 의해서, 믿음을 통해서 경험되며, 인간 편의 공로와 전혀 무관하게 일어난다. 이 시 자체로 보면, 구원이 인간의 의로운 성품 내지 고상한 행위와 어떤 식으로든 관계가 있다는 뜻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머지 성경과 관련해서 보면, 단지 사람을 구원하는 믿음은 거룩한 삶을 가져오는 믿음임을 의미할 뿐이다. 야고보서를 쓴 야고보처럼, 다윗은 여기서, 주님에 대한 참 믿음은 이 시에 묘사된 그런 선한 행실 을 가져온다고 말하고 있다. 이 시는 시온 시민의 모든 미덕을 망라하겠다고 말하지 않는다. 여기에 나타난 묘사는 전체적인 특징은 암시해주나 전체를 다 열거 하지는 않는다.
15:2
무엇보다도 시온 시민은 정직하게 행한다. 정직한 삶은 도덕적으로 건전한 사람이다. 그는 온전하고, 원숙하고, 균형 잡혀있다.둘째로, 시온 시민은 옳은 것을 행한다. 그는 더럽지 않은 양심을 잘 관리한다. 그는 악한 양심을 가지고 이 땅에 머무르기보다는 선 한 양심을 가지고 하늘에 올라가고자 한다.
이 사람은 마음의 진실을 말하는 사람으로 믿을 수 있다. 그는 거짓을 말하느니 차라리 죽기를 원한다. 그의 말은 그를 구속(拘束)한다. 그의 ‘예’는 ‘예’이고, 그의 ‘아니오’는 ‘아니오’이다.

15:3
그는 그 혀로 참소하지 않는다. 당신은 그가 다른 사람을 헐 뜯는 것을 볼 수 없다. 비방과 추한 말은 결코 그의 입술에서 흘러 나오지 않는다. 그는 남을 해치기보다 덕을 끼치기 위해 그 입술을 훈련시킨다! 그는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않는다. 다만 그가 바라는 것은 도와주고, 격려하고, 가르쳐주는 것뿐이다. 그의 친구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을 들을 때면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그 얘기를 중단시키고, 다른 이에게 얘기가 전해지지 않도록 당부한다.
15:4
그의 눈에는 도덕적인 구별이 흐릿하지 않다. 그는 죄와 의, 어두움과 빛, 악과 선을 분별한다. 그는, 그의 불경건함을 진솔하게 지적한다는 점에서 망령된 자를 멸시한다. 반면에, 그는 믿음의 권속 안의 모든 자들과, 마음을 열고 자신을 동일시 한다. 그는 일단 약속을 하면 재정적인 손실을 가져올지라도 그것을 지킨다. 예를 들어 어떤 신자가 그의 집을 85,000달러에 팔기로 약속 했다고 하자. 그런데 계약서에 서명하기 전에 그 집을 아주 큰 회사 에 90,000달러에 팔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는 첫 매입자와 약속을 했으며, 이에 그와 계약을 맺었다.

15:5
그 하나님의 친구는 하나님의 가족의 다른 일원에게 이자를 받고 돈을 빌려주지 않는다. 모세율법 아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방인에게는 이자를 취할 수 있었으나(신 23:19,20), 동료 유대인에게는 그렇게 하는 것이 금지되었다(출 22:25; 레 25:35~37). 만일 율법 아래 사는 유대인이 그 원리의 지배를 받았다면, 은혜 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은 얼마나 더욱 그러하겠는가! 끝으로, 의인은 무죄한 자에게 뇌물을 취하지 않는다. 그는 공의를 왜곡하는 것을 미워하며, “모든 사람이 제 값이 있다”는 옛 속담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상이 시간과 영원 속에서 하나님을 위해 사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 특징을 상고해 보라. 그런 자 외에는 아무도 하나님 존전에서 평안히 머물 수 없다!

16편 :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시편 16편을 이해하는 열쇠는 사도행전 2:25~28에서 발견되는데, 거기서 베드로는 8~11절을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인용하고 있다. 그러면, 그 열쇠로 문을 연 다음, 우리의 놀라운 구주께서 죽음을 목전에 두고 아버지께 직접 아뢰는 기도소리를 들어보자.

16:1~2
온전히 하나님을 의뢰하는 완전한 사람으로서 그리스도께서 유일한 피난처 되신 분께 보호를 호소하신다. 30년 간 지상의 삶을 사는 동안 구주께서는 하나님을 주(主)로 인정하셨을 뿐 아니라 하나님을 자신의 삶의 다함 없는 열정으로 즐거이 고백하셨다. “주를 떠나서는 나의 선함이 없다”(우리말 성경에는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고 되어 있음-역주)는 말은 구주의 무죄성을 부인하는 말이 아니라 단순히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안에서 모든 충족을 발견하셨다는 것을 감동적으로 증거하는 말이다. 이 증거는 시편 73:25의 고백과 비교할 수 있다. “내 육체와 마음은 쇠잔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

16:3
그러나 메시야의 삶이 하나님을 중심에 두었다고 해서 땅에 있는 성도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 배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그 둘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그분의 백성을 사랑하는 것이다(요일 5:1,2). 주 예수님은 자신의 성도를, 그 안에서 모든 기쁨을 발견하는 땅의 존귀한 백성으로 여기신다. 어느 연로 한 하나님의 성도의 유사한 고백을 들어보자. “인생을 시작한 첫 날부터 이 시간까지, 나는 죄악된 죽을 인생이 입을 수 있는 최고의 존귀를 입어왔다. 나의 벗들은 이 땅에서 가장 훌륭한 자들이었으며, 그들은 주님을 위해서 온 정성을 다해 내게 친절을 베풀어왔다.”

16:4
하나님의 참 경배자들과 현저히 대조를 이루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은 다른 신을 경배하는 자들이다. 우상숭배는 반드시 그 참가자의 삶에 슬픔의 흔적을 남긴다. 아마 우상숭배자들에게 임하는 최대의 심판 중 하나는 그들이 그 숭배 대상과 같아진다는 것이리라. 하나님의 거룩하신 아들은 그들이 드리는 피의 전제(奠祭)에 참여하는 것을 일절 거부하신다. 사실 그분은 그들에 대해, 혹은 그 들의 이교도 의식에 대해 관용을 암시하는 태도로 그 이름을 언급 하는 것조차 거부하신다.

 16:5~6
그 개인적인 삶에 있어서, 그리스도께서 택하신 산업(분깃)과 잔은 여호와이시다. 그분의 모든 부요와 즐거움은 하나님께 의존한다. 그분의 기업의 경계를 지키시는 이는 여호와이시다. 아 버지께서 얼마나 지혜롭고 놀랍게 자신의 삶을 세세히 계획하신 것을 생각하면서 그분은 그것을, 전망이 뛰어난 아름다운 곳과, 아름다운 것들로만 이뤄진 기업에 비유하신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면 우리 역시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장식해주시는데 대해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다. 혹 우리가 불평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능력을 믿지 못함을 드러내는 것이다.

16:7
여기서 그리스도께서는 삶의 모든 순간에 지도와 교훈을 베풀어주신 신실하심으로 인해 여호와를 찬양한다. 기도와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느라 잠을 못 이루는 시간에도 그분의 마음이 그분을 교훈했다. 시간은 낭비됨 없이 그분을 위로하고 축복하는데 드려졌다. 그리스도의 이같은 경험은 얼마나 종종 하나님의 백성의 삶에서 되풀이되는지! “빛의 아들들 가운데 많은 훌륭한 시인들이 그 아름다운 작품에 대해 고백하는 말, ‘나는 밤에 그것을 배웠다네.’ 아버지의 집을 채우는 많은 아름다운 찬송이 처음 흘러나온 곳은, 어두운 방 그늘이네.” (저자 익명).
시편 16편 나머지 구절들은 오순절 날 베드로에 의해, 그리스도의 부활을 가리키는 말씀으로 인용되었다. “다윗이 저를 가리켜 가로되, 내가 항상 내 앞에 계신 주를 뵈웠음이여, 나로 요동치 않게 하기 위하여 그가 내 우편에 계시도다. 이러므로 내 마음이 기뻐하였고, 내 입술도 즐거워하였으며, 육체는 희망에 거하리니, 이는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 주의 거룩한 자로 썩음을 당치 않게 하실 것임이로다. 주께서 생명의 길로 내게 보이셨으니 주의 앞에서 나로 기쁨이 충만하게 하시리로다 하였으니,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 그는 선지자라. 하나님이 이미 맹세하사 그 자손 중에서 한 사람을 그 위에 앉게 하리라 하심을 알고 미리 보는 고로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을 말하되,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 하더니, 이 예수를 하나님이 살리신지라. 우리가 다 이 일에 증인이로다. 하나님이 오른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 주셨느니라”(행 2:25~33). 그러면 베드로가 한 말의 요지를 살펴보자(베드로의 해설이 없었다면 이 시의 대부분 요지를 우리가 파악하지 못했을 것이다).

(1) 다윗은 그리스도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25절). 다윗은 그 몸이 지금도 예루살렘 무덤에 있으므로 그 자신에 대해 말했을 리가 없다.
(2) 선지자로서 시편기자는 그분의 보좌에서 다스릴 때가 오기 전에 하나님이 그리스도를 살리실 것을 알았다.
(3) 따라서 다윗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영혼을 음부에 머물게 하거나 그리스도의 몸을 썩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리라고 예언했다.
(4) 하나님은 실로 그리스도를 일으키셨으며, 오순절 날 일어난 일은 그분이 하나님 우편에서 영광을 얻으신 결과였다. 이상의 서론을 염두에 두고 이제 이 시의 마지막 구절들을 살펴 보기로 하자.

16:8
먼저, 메시야께서는 자신이 여호와를 항상 앞에 모시고 있다고 일절 모호함 없이 고백하신다. 여호와께서 메시야의 삶의 목적이었다. 메시야께서는 자기 스스로 아무것도 행치 않으셨다. 모든 일은 그분의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여 행해졌다. “그가 내 우편에 계시므로 내가 요동치 아니하리로다.” 성경에서 “우편”(오른손)은 다음과 같은 의미가 있다.
능력(시 89:13), 안전(시 20:6), 존귀(시 45:9; 110:1), 기쁨(시 16: 11), 은총(시 80:17), 지원(시 18:35). 여기서는 안전과 안정을 가리킨다.

16:9~10
하나님의 변함 없는 돌보심과 보호를 확신하며 구주께서는 미래를 확신을 가지고 바라본다. 그분의 마음은 기뻤다. 그분의 영(우리말 성경 난하주 참조-역주)은 즐거워했고 그분의 육체는 안전했다. 그분은 하나님이 자신의 영혼을 음부에 버려두거나 자신의 육체로 썩음을 보지 않게 하실 것을 알았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이다. 음부(스올)에 대한 언급은 설명이 필요하다. 그것은 구약에서 무덤이나 “저승” (netherworld)이나 혹은 육체를 떠난 상태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그것은 헬라어 “하데스”(지옥)와 동일하다. 음부는 지리적인 위치가 아닌 죽은 자의 ‘상태’-인격이 육체에 분리된 상태-를 가리켰다. 그것은 신자와 불신자를 막론하고 모든 죽은 자를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반면에, 신약의 동의어인 ‘하데스’는 ‘불신자’에 대해서만 사용된다. 음부는 매우 불분명하고 부정확한 단어였다. 그것은 죽음 후의 삶에 대해 명확히 표현해주지 않았다. 사실 그것은 정확한 지식보다는 불확실함을 더 표현해주었다. 신약에서는 모든 것이 변했다. 그리스도께서 복음을 통해서 생명과 썩지 않음을 밝히 드러내셨다(딤후 1:10). 오늘날 우리는 불신자가 죽으면 그의 영과 혼은 하데스라 불리는 고통의 상태에 처하고 (눅 16:23) 그 몸은 무덤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신자의 영과 혼은 하늘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 위해 올라가고(고후 5:8; 빌 1:23) 그 땅에 속한 몸은 무덤에 들어간다. “내 영혼을 음부에 버리지 아니하시며”라고 구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하나님이 그분을 육체가 분리된 상태에 머물게 하지 않으실 것을 그분이 미리 알고 계셨음을 드러낸 것이다. 그분은 비록 음부에 들어가긴 했지만 그곳에 머물지는 않으셨다. 하나님은 정상적인 부패 과정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셨다. 기적적인 보존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생명 없는 몸은 사흘동안 썩음에서 보존된 것이다.

16:11
마지막 구절에서 우리의 복스런 주님은 하나님이 생명의 길-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길-을 자신에게 보여주실 것을 온전히 확신하셨다. 그 길은 궁극적으로 그분을 하늘로, 하나님 존전으로 인도하실 것이다. 거기서 그분은 기쁨의 충만과 영원한 즐거움을 경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