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공부 매일성경연구 시편 23-24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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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4월 16일 2021년본문
시편23-24편 연구
23편 : 위대한 목자
23편은 아마도 모든 문학작품 가운데 가장 사랑 받는 시일 것이다. 엄숙한 공석에서 읽혀지든 아니면 주일학교 시간에 암송되든 간에 이 23편은 항상 변함 없는 매력과 죽지 않는 메시지를 지닌다. “시편 23편이 태어난 날이 복이 있을지라”라고 한 연로한 신학자는 표현했다. J. R. 리틀프라우드의 개요는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행복한 삶의 비결-모든 필요가 채워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행복은 죽음의 비결-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행복한 영원의 비결-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23:1
전세계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할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물론 선한 목자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러나 분명한 믿음의 행위로 그분을 실제로 영접하는 자들만이 그분의 양이다. 그분의 구속사역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지만’, 실제로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만 그것이 ‘유효하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나의’(my)라는 인칭 대명사에 달려있다. 그분이 ‘나의’ 목자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 시의 나머지는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분이 진정 나의 것이며 내가 진정 그분의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23:2
그분이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므로 나는 내 영혼이나 육체에 필요한 양식이 부족치 않을 것이다. 그분이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므로 나는 생기가 부족치 않을 것이다.
23:3
그분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므로 나는 활력이 부족치 않을 것이다. 그분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므로 나는 도덕적인 지시가 부족치 않을 것이다. 한 꼬마가 이 시를 낭송하려다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걱정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색다른 번역을 보고 깜짝 놀라기에 함께 웃은 일이 있는데, 그 꼬마는 틀린 것이 아니라 옳았다. 그는 정확한 단어는 놓쳤지만 정확한 의미는 잡은 것이다. 만일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라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23:4
그리고 우리는 사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목자께서 바로 거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 즉 자백하고 버리지 않은 죄이다. 그러나 신자들의 경우에는 그리스도께서 사망으로부터 그 쏘는 것을 빼앗아 가셨다. 그분은 단번에 영원히 우리의 죄를 없이 하셨다. 이제 사망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이 실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위로와 보호와 인도의 도구이다. 필요 할 때면 그분은 또한 교정의 지팡이를 사용하실 수도 있다. 대부분의 양들은 때때로 그러한 도움을 필요로 한다.
23:5
그 사이에, 목자는 우리의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상을 베푸신다. 그 상에는 그분이 그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위해 사신 모든 신령한 축복이 배설된다. 그 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 비록 원수에게 둘러싸였지만, 우리는 평안과 안전 가운데 그러한 축복들을 누린다. J. H. 조웻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동양의 손님맞이는 손님의 안전을 보장한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한다. 그를 장막에 인도해들이고 그 앞 에 음식을 배설한다. 그 동안 그를 뒤쫓던 추적자들은 문가에 서서 씩씩거린다’.” 그분은 또한 우리 머리에 기름을 부으신다. 목자들은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양들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제사장들의 경우 기름 붓는 것은 그들을 사역에 위임하는 것을 뜻한다. 왕들의 경우 기름 붓는 것은 즉위식과 관계가 있다. 모든 신자는 구주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다. 이 기름부음은 성령 하나님의 가 르치는 사역을 그에게 보증한다.
23:6
끝으로 행복한 영원의 비결이 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호위를 받아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영원한 거처인 아버지 집에 이른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는 얼마나 복 받은 거지들인가!”라고 한 가이 킹의 고백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24편 : 영광의 왕이 뉘시뇨?
24편은 대환란 끝에 일어나는 영광스런 사건을 대망한다. 하나님의 맹렬한 심판이 그치고 주 예수께서 지상에 재림하사 모든 대적을 멸하시고 이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다스리기 위해 예루 살렘에 입성하신다. 이것은 세상이 이제껏 보지 못한 개선행진이다. 지켜보는 자들은 한 때 구주의 고난의 깊이에 놀랐듯이 이제는 그분의 영광의 높이에 할 말을 잃는다.
24:1~2
무리가 그 성에 가까이 이르자 땅과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선포가 울려 퍼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유권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권에 대한 선언이다. 그런 다음 그 이유가 주어진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지은 분이시다. 그분이 물들을 한 곳에 모으고 마른 땅이 나타나게 하셨다. 그분이 강들을 만드시되 일부는 땅 위에, 일부는 땅 아래 두셨다. 그러기에 이제 그분이, 실은 그 분의 소유인데 오랜 세기 동안 거부되어온 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 하기 위해 오신다.
24:3~6
다음 네 구절은 그 나라에 들어가 천년간의 평화와 번영의 통치를 누릴 백성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믿는 잔존 자와,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올라갈 구속받은 이방인들이다. 그들은 그 선한 성품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듯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성품은 그들이 위로부터 태어난 결과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보거나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요 3:3,5). 그들은 대환란을 통과하고 그 옷을 어린양의 피로 희게 한 귀한 성도들이다. 그들의 성품의 네 가지 특징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손이 깨끗하다. 다시 말해서 그 행실은 의롭고 흠이 없다. 그들은 마음이 청결하다. 즉 그 동기가 정직하고 그 생각이 부패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거짓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끝으로, 그 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증거함으로 정의를 굽게 하지 않는다. 그들 의 손과 마음과 뜻과 입술 등 모두가 의롭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에서 종이 될 사람들이다. 전에는 경건치 않는 자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했지만 이제 그들은 그 구원의 하나님에 의해 변호를 받을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천년왕국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이요, 쓸모 없는 자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24:7~8
나는 이 행렬이,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가며 1~6절을 노래하는 모습을 즐겨 묵상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노래 소리는 행렬의 선두에 선 전령의 나팔소리에 의해 중단된다. 그는 예루살렘 성문의 파수꾼들에게 외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성벽 위의 한 파수꾼이 인상적인 어조로 크게 외쳐 묻는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그 대답이 또렷하게 크게 울린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24:9~10
그들은 이제 성에 더욱 가까이 이르렀고 성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전령이 영광의 왕에게 문을 열어드리라고 다시금 명한다. 다시 한 번 왕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 그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라고 대답한다. 이어서 왕께서 그 못 박혔던 손에 우주통치의 홀을 쥐신 채 그분의 충성스런 종들과 함께 그 성에 들어가신다. F. B. 메이어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시는 예수께서 우리를 다스리는 왕으로 우리 마음에 들어가 실 때 우리 안에서 성취되며, 땅과 그 거민이 그분을 주로 맞이할 때 그 완전한 실현을 볼 것이다.”
23편 : 위대한 목자
23편은 아마도 모든 문학작품 가운데 가장 사랑 받는 시일 것이다. 엄숙한 공석에서 읽혀지든 아니면 주일학교 시간에 암송되든 간에 이 23편은 항상 변함 없는 매력과 죽지 않는 메시지를 지닌다. “시편 23편이 태어난 날이 복이 있을지라”라고 한 연로한 신학자는 표현했다. J. R. 리틀프라우드의 개요는 덧붙일 말이 없을 정도로 뛰어나다. “행복한 삶의 비결-모든 필요가 채워지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행복은 죽음의 비결-모든 두려움이 사라지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행복한 영원의 비결-모든 소원이 이루어지다. ‘나의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정녕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거하리로다’.”
23:1
전세계적인 인기에도 불구하고 이 시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직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라고 고백할 자격이 있는 자들에게만 적용될 수 있다. 물론 선한 목자께서는 모든 사람을 위해 죽으셨다. 그러나 분명한 믿음의 행위로 그분을 실제로 영접하는 자들만이 그분의 양이다. 그분의 구속사역은 모든 사람에게 ‘충분하지만’, 실제로 그분을 믿는 사람에게만 그것이 ‘유효하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나의’(my)라는 인칭 대명사에 달려있다. 그분이 ‘나의’ 목자가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 시의 나머지는 나에게 속하지 않는다. 반면에, 그분이 진정 나의 것이며 내가 진정 그분의 것이라면, 그렇다면 나는 그분 안에서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다!
23:2
그분이 나를 푸른 초장에 누이시므로 나는 내 영혼이나 육체에 필요한 양식이 부족치 않을 것이다. 그분이 나를 쉴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므로 나는 생기가 부족치 않을 것이다.
23:3
그분이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므로 나는 활력이 부족치 않을 것이다. 그분이 자신의 이름을 위하여 나를 의의 길로 인도하시므로 나는 도덕적인 지시가 부족치 않을 것이다. 한 꼬마가 이 시를 낭송하려다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가 걱정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색다른 번역을 보고 깜짝 놀라기에 함께 웃은 일이 있는데, 그 꼬마는 틀린 것이 아니라 옳았다. 그는 정확한 단어는 놓쳤지만 정확한 의미는 잡은 것이다. 만일 여호와가 우리의 목자라면 우리는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23:4
그리고 우리는 사망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은 목자께서 바로 거기에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이다. 사망의 쏘는 것은 죄, 즉 자백하고 버리지 않은 죄이다. 그러나 신자들의 경우에는 그리스도께서 사망으로부터 그 쏘는 것을 빼앗아 가셨다. 그분은 단번에 영원히 우리의 죄를 없이 하셨다. 이제 사망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최악의 것이 실은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최선의 것이 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노래할 수 있다. 목자의 지팡이와 막대기는 위로와 보호와 인도의 도구이다. 필요 할 때면 그분은 또한 교정의 지팡이를 사용하실 수도 있다. 대부분의 양들은 때때로 그러한 도움을 필요로 한다.
23:5
그 사이에, 목자는 우리의 원수의 목전에서 우리에게 상을 베푸신다. 그 상에는 그분이 그 보배로운 피로 우리를 위해 사신 모든 신령한 축복이 배설된다. 그 상은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속한 모든 것을 상징한다. 비록 원수에게 둘러싸였지만, 우리는 평안과 안전 가운데 그러한 축복들을 누린다. J. H. 조웻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동양의 손님맞이는 손님의 안전을 보장한다. ‘그를 보호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조치들을 취한다. 그를 장막에 인도해들이고 그 앞 에 음식을 배설한다. 그 동안 그를 뒤쫓던 추적자들은 문가에 서서 씩씩거린다’.” 그분은 또한 우리 머리에 기름을 부으신다. 목자들은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양들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 제사장들의 경우 기름 붓는 것은 그들을 사역에 위임하는 것을 뜻한다. 왕들의 경우 기름 붓는 것은 즉위식과 관계가 있다. 모든 신자는 구주를 영접하는 순간 성령의 기름부음을 받는다. 이 기름부음은 성령 하나님의 가 르치는 사역을 그에게 보증한다.
23:6
끝으로 행복한 영원의 비결이 있다. 평생 동안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의 호위를 받아 우리는 마침내 우리의 영원한 거처인 아버지 집에 이른다. 그 모든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우리는 얼마나 복 받은 거지들인가!”라고 한 가이 킹의 고백에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24편 : 영광의 왕이 뉘시뇨?
24편은 대환란 끝에 일어나는 영광스런 사건을 대망한다. 하나님의 맹렬한 심판이 그치고 주 예수께서 지상에 재림하사 모든 대적을 멸하시고 이제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로 다스리기 위해 예루 살렘에 입성하신다. 이것은 세상이 이제껏 보지 못한 개선행진이다. 지켜보는 자들은 한 때 구주의 고난의 깊이에 놀랐듯이 이제는 그분의 영광의 높이에 할 말을 잃는다.
24:1~2
무리가 그 성에 가까이 이르자 땅과 그 모든 것이 하나님께 속했다는 선포가 울려 퍼진다. 그것은 하나님의 소유권과, 그리스도의 완전한 통치권에 대한 선언이다. 그런 다음 그 이유가 주어진다. 그리스도는 세상을 지은 분이시다. 그분이 물들을 한 곳에 모으고 마른 땅이 나타나게 하셨다. 그분이 강들을 만드시되 일부는 땅 위에, 일부는 땅 아래 두셨다. 그러기에 이제 그분이, 실은 그 분의 소유인데 오랜 세기 동안 거부되어온 것에 대한 권리를 주장 하기 위해 오신다.
24:3~6
다음 네 구절은 그 나라에 들어가 천년간의 평화와 번영의 통치를 누릴 백성들을 묘사한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믿는 잔존 자와, 예루살렘 성전에 예배하러 올라갈 구속받은 이방인들이다. 그들은 그 선한 성품 때문에 그 나라에 들어갈 자격이 있는 듯 보이나, 실은 그렇지 않다. 그들의 성품은 그들이 위로부터 태어난 결과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보거나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요 3:3,5). 그들은 대환란을 통과하고 그 옷을 어린양의 피로 희게 한 귀한 성도들이다. 그들의 성품의 네 가지 특징이 구체적으로 밝혀졌다. 그들은 손이 깨끗하다. 다시 말해서 그 행실은 의롭고 흠이 없다. 그들은 마음이 청결하다. 즉 그 동기가 정직하고 그 생각이 부패되지 않았다. 그들은 어떤 형태로든 거짓에 동의하지 않는다. 그리고 끝으로, 그 들은 사실이 아닌 것을 증거함으로 정의를 굽게 하지 않는다. 그들 의 손과 마음과 뜻과 입술 등 모두가 의롭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천년왕국에서 종이 될 사람들이다. 전에는 경건치 않는 자들에게 조롱과 멸시를 당했지만 이제 그들은 그 구원의 하나님에 의해 변호를 받을 것이다. 그렇다. 그들은 천년왕국의 시민으로서, 하나님의 얼굴을 구하는 자들이요, 쓸모 없는 자들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에게 은혜를 받은 자들이다.
24:7~8
나는 이 행렬이, 기드론 골짜기를 건너가며 1~6절을 노래하는 모습을 즐겨 묵상한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노래 소리는 행렬의 선두에 선 전령의 나팔소리에 의해 중단된다. 그는 예루살렘 성문의 파수꾼들에게 외친다. “문들아 너희 머리를 들지어다. 영원한 문들아 들릴지어다. 영광의 왕이 들어 가시리로다!” 성벽 위의 한 파수꾼이 인상적인 어조로 크게 외쳐 묻는다. “영광의 왕이 뉘시뇨?” 그 대답이 또렷하게 크게 울린다. “강하고 능한 여호와시요 전쟁에 능한 여호와시로다.”
24:9~10
그들은 이제 성에 더욱 가까이 이르렀고 성문은 여전히 열리지 않았다. 그래서 전령이 영광의 왕에게 문을 열어드리라고 다시금 명한다. 다시 한 번 왕의 정체를 묻는 질문에 그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곧 영광의 왕이시로다”라고 대답한다. 이어서 왕께서 그 못 박혔던 손에 우주통치의 홀을 쥐신 채 그분의 충성스런 종들과 함께 그 성에 들어가신다. F. B. 메이어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 시는 예수께서 우리를 다스리는 왕으로 우리 마음에 들어가 실 때 우리 안에서 성취되며, 땅과 그 거민이 그분을 주로 맞이할 때 그 완전한 실현을 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