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공부 매일성경연구 시편 25-2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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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4월 19일 2021년본문
매일성경연구 시편 25-26편
시편25-26편 연구
25:1~3
먼저 보호의 기도가 나온다. 다윗의 대적은 결코 멀리 있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을 유일한 신뢰 대상으로 인정한다. 다윗의 두 가지 간구는, 자신이 여호와를 의뢰함으로써 좌절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과, 하나님이 그 자녀를 버리심으로 그의 대적이 만족해하는 일이 없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모든 이들의 기도이다. 의도적으로 거짓되게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넘치는 수치를 당케 해주시기를 바랬다.
25:4~5
다음 단락에서 시편 기자는 한 제자가 가르침을 구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는 여호와의 길을 알고, 그 길로 행하고, 그리고 그 진리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한다. 그의 동기는 그의 구원의 하나님, 즉 그의 모든 소망을 둔 분에 대한 사랑에 기인한다.
25:6~7
이어서 다윗은 용서를 구하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여호와의 오래 참는 자비와 인자에 호소하며, 과거에 큰 은혜를 베푸신 것(마치 잊어버리셨듯이!)을 기억해 주실 것을 여호와께 구한다. 혹 그러한 요청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다윗의 불완전한 이해를 드러낼지라도, 그는 그림자의 시대에 살았고 우리는 복음시대의 온전한 빛을 누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윗이 젊을 때 지은 죄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는데, 지난 죄는 으레 그런 영향을 끼치는 법이다. 시편 기자는 그러한 죄를 잊고, 그분의 인자를 쫒아서, 그분의 선하심을 위하여 그를 기억해달라고 여호와께 간결하게 구한다.
25:8~10
다윗은 이제 기도에서 묵상으로 나아간다. 그는 여호와의 가르침 사역을 생각하며 깊은 감격에 사로잡힌다. 여호와께서 는 근본적으로 선하고 정직하신 까닭에 진리와 공의와 구원의 도로 죄인들을 가르치신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겸손이다. 우리는 우리의 무지와, 우리 자신이 가르침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가르침을 잘 받는다면, 곧 우리는 옳은 것, 즉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은 불행한 삶을 고집하지 않으며, 인생은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의 증거로 가득함을 알게 된다.
25:11
다윗은 이제 용서를 위한 기도로 돌아온다. 그의 죄의 심각성을 철저히 인식한 까닭에 그는 “주의 이름”을 근거로 호소한다. 어떤 사람의 이름은 종종 그 사람 자신을 대표하므로 시편 기자는 여기서 하나님 자신의 성품(특히, 그분의 자비와 은혜)을 용서의 유일한 근거로 언급하고 있다. 다윗 자신의 공로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다!
25:12~13
다시 한번 그는 기도를 중단하고 영적인 독백에 들어간다.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최선을 즐기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런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것을 경험할 것이다.
확실한 인도―하나님이 그에게 갈길을 보이실 것이다
개인적인 형통―그는 풍성한 기업을 누릴 것이다
가정적인 안전―그의 자녀가 땅을 소유할 것이다
거룩한 사귐―그는 여호와께서 그 마음과 뜻을 친밀히 계시하시는 친구의 범주에 들 것이다
25:14
본 절은 의문의 여지없이 이 시의 핵심구절이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크게 사랑 받는 사람”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이 우리 주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교체되는 놀라운 이상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던 제자인 요한에게 밧모 섬의 영광스런 계시가 주어졌다.
25:15
다윗은 그 자신을 그러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무리에 포함 시킨다. 그의 눈은 항상 믿음과 소망 중에 위를 앙망하며, 그는 여호와께서 그가 현재 걸려든 환란과 곤경의 그물에서 건져주실 것을 확신한다
25:16~21
그물에 대한 언급은 다윗으로 영적인 환상에서 깨어나 현재의 곤경에 대해 기도하게끔 자극을 준다. 그는 외롭고 괴로 웠다. 그 마음의 근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비로 그를 돌아보시고, 그 마음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시고,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그의 환란을 살피시고, 그리고 그의 모든 죄를 사해주실 것을 간청한다. 또한 다윗은 여호와께, 그를 대적과 그 맹렬한 증오에서 보호하사 여호와를 신뢰한 대가를 보게 해주실 것을 구한다. “성실 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라고 그가 기도한 것은 그 자신의 청렴함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분을 신뢰하는 자를 구원하사 그분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보이라고 하나님께 구한 것이다.
25:22
마지막 구절에서 다윗은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하며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해 기도한다. 이것은 장차 올 환란 시대 동안에는 이 시와 같은 시가 경건한 유대인 잔존자의 고백이 될 것을 암시해준다.
26편 :
성별(분리)의 시 26편을 처음 대할 때는 그것이 굉장한 이기주의자의 작품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좀 주의 깊게 살피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성별된 삶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이면의 뜻을 헤아려 볼 때, 우리는 다윗이 이제까지 불경건한 자들과 사귀며 그로써 여호와께 불충성한다는 지적을 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 그는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 지적되는 부분들에 대해 자신은 “잘못이 없음”을 호소하는 것이다.
26:1~3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의 변호를 구한다. 그의 고발자들의 말과 상반되게, 다윗은 도덕적으로 정직하게 행동해왔다. 그는 일관되게 여호와를 의지해왔다. 야금술(冶 金術)에서 빌려온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는 진실성과 정직성을 시험받고, 그 불순물로 인해 풀무에서 연단받기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린다. 그 마음(사랑)과 그 뜻(동기) 모두에 있어서, 그는 항상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그 앞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을 다해왔으므로 자신의 결백이 입증될 것을 확신했다.--
26:4~5
우상을 숭배하는 인생들(우리말 성경에는 ‘허망한 사람’ 으로 되어 있음-역주)과 같이 앉는다는 것은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사귀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그렇게 행하지 않았다. 간사한 자와 동행한다는 것은 속이는 자들과 과시하는 자들과 기꺼이 한 무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그렇게 행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그는 행악자들과 한 무리가 되는 것을 미워했으며, 악한 자와의 사귐을 피하겠다는 거룩한 결단을 보여주었다.
26:6~8
그러나 그의 분리는 단지 악인에게서 떠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분리되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단에 가까이 이르기 전에 다윗은 그 손에서 죄와 더러움을 반드시 깨끗이 했다. 그런 다음 헌신된 예배자로서 그는 마음을 다해 감사 찬송을 부르고 여호와의 기이한 일을 진술했다. 그에게 있어 예배는 금욕적으로 견뎌야 할 지루한 의식이 아니었다. 그는 영광의 구름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런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전을 진실로 사랑 했다.
26:9~11
그는 이 세상에서 행악자들과 함께 하기를 거절했으므로 다음 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는 삶에 있어서 죄인과 살인자와 뇌물 주는 자들의 습관을 멀리했다. 이제 그는 죽음에 있어서 그들과 한 무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아왔으므로 이제 악인의 운명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 대우받게 해달라고 구한다.
26:12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삶의 평탄한 기초 위에 서서 다윗은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할 것을 서원한다. 우리는 이 시에서 다뤄지지 않은 분리의 한 측면이 있음을 주목 해야 한다. 우리는 비록, 그들의 악함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거나 동조하는 면에 있어서는 죄인들과 마땅히 분리되어야 하나,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말해주어야 할 때는 그들과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주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이셨다. 그분은 그들을 영접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충성을 타협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그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해서, 또 용서가 필요함에 대해서 말해주는데 실패하지 않으셨다. 만일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님의 마음으로 저들의 집을 방문하고 또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그 일을 계속하도록 하라.
시편25-26편 연구
25:1~3
먼저 보호의 기도가 나온다. 다윗의 대적은 결코 멀리 있지 않은 듯하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을 유일한 신뢰 대상으로 인정한다. 다윗의 두 가지 간구는, 자신이 여호와를 의뢰함으로써 좌절하지 않게 해달라는 것과, 하나님이 그 자녀를 버리심으로 그의 대적이 만족해하는 일이 없게 해달라는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를 의뢰하는 모든 이들의 기도이다. 의도적으로 거짓되게 행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넘치는 수치를 당케 해주시기를 바랬다.
25:4~5
다음 단락에서 시편 기자는 한 제자가 가르침을 구하는 모습을 그린다. 그는 여호와의 길을 알고, 그 길로 행하고, 그리고 그 진리 안에서 성장하기를 원한다. 그의 동기는 그의 구원의 하나님, 즉 그의 모든 소망을 둔 분에 대한 사랑에 기인한다.
25:6~7
이어서 다윗은 용서를 구하는 죄인의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는 여호와의 오래 참는 자비와 인자에 호소하며, 과거에 큰 은혜를 베푸신 것(마치 잊어버리셨듯이!)을 기억해 주실 것을 여호와께 구한다. 혹 그러한 요청이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다윗의 불완전한 이해를 드러낼지라도, 그는 그림자의 시대에 살았고 우리는 복음시대의 온전한 빛을 누리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다윗이 젊을 때 지은 죄가 그를 괴롭히고 있었는데, 지난 죄는 으레 그런 영향을 끼치는 법이다. 시편 기자는 그러한 죄를 잊고, 그분의 인자를 쫒아서, 그분의 선하심을 위하여 그를 기억해달라고 여호와께 간결하게 구한다.
25:8~10
다윗은 이제 기도에서 묵상으로 나아간다. 그는 여호와의 가르침 사역을 생각하며 깊은 감격에 사로잡힌다. 여호와께서 는 근본적으로 선하고 정직하신 까닭에 진리와 공의와 구원의 도로 죄인들을 가르치신다. 우리가 그분에게서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자질은 겸손이다. 우리는 우리의 무지와, 우리 자신이 가르침이 더 필요하다는 사실을 겸손히 인정해야 한다. 만일 우리가 가르침을 잘 받는다면, 곧 우리는 옳은 것, 즉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이다.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은 불행한 삶을 고집하지 않으며, 인생은 하나님의 변함 없는 사랑과 신실하심의 증거로 가득함을 알게 된다.
25:11
다윗은 이제 용서를 위한 기도로 돌아온다. 그의 죄의 심각성을 철저히 인식한 까닭에 그는 “주의 이름”을 근거로 호소한다. 어떤 사람의 이름은 종종 그 사람 자신을 대표하므로 시편 기자는 여기서 하나님 자신의 성품(특히, 그분의 자비와 은혜)을 용서의 유일한 근거로 언급하고 있다. 다윗 자신의 공로에 대해선 한 마디도 없다!
25:12~13
다시 한번 그는 기도를 중단하고 영적인 독백에 들어간다. 그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사람을 하나님의 최선을 즐기는 사람으로 묘사한다. 그런 사람은 다음과 같은 것을 경험할 것이다.
확실한 인도―하나님이 그에게 갈길을 보이실 것이다
개인적인 형통―그는 풍성한 기업을 누릴 것이다
가정적인 안전―그의 자녀가 땅을 소유할 것이다
거룩한 사귐―그는 여호와께서 그 마음과 뜻을 친밀히 계시하시는 친구의 범주에 들 것이다
25:14
본 절은 의문의 여지없이 이 시의 핵심구절이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 “크게 사랑 받는 사람” 다니엘에게 하나님은 이방 나라들이 우리 주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나라로 교체되는 놀라운 이상을 계시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의 가슴에 기대던 제자인 요한에게 밧모 섬의 영광스런 계시가 주어졌다.
25:15
다윗은 그 자신을 그러한 하나님을 경외하는 무리에 포함 시킨다. 그의 눈은 항상 믿음과 소망 중에 위를 앙망하며, 그는 여호와께서 그가 현재 걸려든 환란과 곤경의 그물에서 건져주실 것을 확신한다
25:16~21
그물에 대한 언급은 다윗으로 영적인 환상에서 깨어나 현재의 곤경에 대해 기도하게끔 자극을 준다. 그는 외롭고 괴로 웠다. 그 마음의 근심이 많았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자비로 그를 돌아보시고, 그 마음의 무거운 짐을 덜어주시고, 고난에서 건져주시고, 그의 환란을 살피시고, 그리고 그의 모든 죄를 사해주실 것을 간청한다. 또한 다윗은 여호와께, 그를 대적과 그 맹렬한 증오에서 보호하사 여호와를 신뢰한 대가를 보게 해주실 것을 구한다. “성실 과 정직으로 나를 보호하소서”라고 그가 기도한 것은 그 자신의 청렴함을 가리킨 것이 아니라, 그분을 신뢰하는 자를 구원하사 그분의 의로우심을 나타내 보이라고 하나님께 구한 것이다.
25:22
마지막 구절에서 다윗은 자기 자신을 이스라엘과 동일시하며 이스라엘의 구속을 위해 기도한다. 이것은 장차 올 환란 시대 동안에는 이 시와 같은 시가 경건한 유대인 잔존자의 고백이 될 것을 암시해준다.
26편 :
성별(분리)의 시 26편을 처음 대할 때는 그것이 굉장한 이기주의자의 작품이라고 결론 내릴 수도 있다. 하지만 좀 주의 깊게 살피면 세상으로부터 하나님께로 성별된 삶에 대한 사실적인 묘사임을 알게 될 것이다. 그 이면의 뜻을 헤아려 볼 때, 우리는 다윗이 이제까지 불경건한 자들과 사귀며 그로써 여호와께 불충성한다는 지적을 받아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그는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다. 그는 자신의 무죄함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잘못으로 구체적으로 지적되는 부분들에 대해 자신은 “잘못이 없음”을 호소하는 것이다.
26:1~3
그는 자신의 문제를 하나님께 아뢰며 하나님의 변호를 구한다. 그의 고발자들의 말과 상반되게, 다윗은 도덕적으로 정직하게 행동해왔다. 그는 일관되게 여호와를 의지해왔다. 야금술(冶 金術)에서 빌려온 표현으로 말하자면, 그는 진실성과 정직성을 시험받고, 그 불순물로 인해 풀무에서 연단받기 위해서 자신을 하나님께 내어드린다. 그 마음(사랑)과 그 뜻(동기) 모두에 있어서, 그는 항상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그 앞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에 충성을 다해왔으므로 자신의 결백이 입증될 것을 확신했다.--
26:4~5
우상을 숭배하는 인생들(우리말 성경에는 ‘허망한 사람’ 으로 되어 있음-역주)과 같이 앉는다는 것은 그들과 같은 마음으로 사귀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그렇게 행하지 않았다. 간사한 자와 동행한다는 것은 속이는 자들과 과시하는 자들과 기꺼이 한 무리가 되는 것을 의미한다. 다윗은 그렇게 행하지도 않았다. 반대로, 그는 행악자들과 한 무리가 되는 것을 미워했으며, 악한 자와의 사귐을 피하겠다는 거룩한 결단을 보여주었다.
26:6~8
그러나 그의 분리는 단지 악인에게서 떠나는 것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분리되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단에 가까이 이르기 전에 다윗은 그 손에서 죄와 더러움을 반드시 깨끗이 했다. 그런 다음 헌신된 예배자로서 그는 마음을 다해 감사 찬송을 부르고 여호와의 기이한 일을 진술했다. 그에게 있어 예배는 금욕적으로 견뎌야 할 지루한 의식이 아니었다. 그는 영광의 구름이 하나님 자신의 영광스런 임재를 상징하는 여호와의 전을 진실로 사랑 했다.
26:9~11
그는 이 세상에서 행악자들과 함께 하기를 거절했으므로 다음 세상에서 그들과 같은 운명을 당하지 않게 되기를 기도한다. 그는 삶에 있어서 죄인과 살인자와 뇌물 주는 자들의 습관을 멀리했다. 이제 그는 죽음에 있어서 그들과 한 무리가 되지 않게 해달라고 호소한다. 그는 의로운 삶을 살아왔으므로 이제 악인의 운명에서 구원받고 하나님의 모든 은혜로 대우받게 해달라고 구한다.
26:12
책망 받을 것이 없는 삶의 평탄한 기초 위에 서서 다윗은 회중에서 여호와를 송축할 것을 서원한다. 우리는 이 시에서 다뤄지지 않은 분리의 한 측면이 있음을 주목 해야 한다. 우리는 비록, 그들의 악함에 묵시적으로 동의하거나 동조하는 면에 있어서는 죄인들과 마땅히 분리되어야 하나, 그들에게 그리스도가 필요함을 말해주어야 할 때는 그들과 동떨어져 있어서는 안 된다. 주 예수님은 죄인의 친구이셨다. 그분은 그들을 영접하셨을 뿐 아니라 그들과 함께 먹고 마셨다. 그러나 그분은 하나님께 대한 자신의 충성을 타협하지 않으셨으며, 또한 그들에게 그들의 죄에 대해서, 또 용서가 필요함에 대해서 말해주는데 실패하지 않으셨다. 만일 구원받지 않은 사람들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우리 주님의 마음으로 저들의 집을 방문하고 또 주님께서 하신 것처럼 말하고 행동한다면, 그들로 하여금 어떻게든 그 일을 계속하도록 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