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공부 시편 69-70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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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5월 19일 2021년본문
시편 69-70편 연구
69편 :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69:1~3
여기 69편에서 우리는 죽음에 잠기실 때 주님의 거룩한 영혼이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듣는 특권을 누린다. 물이 그분의 목까지 올라왔으며 그분을 완전히 삼키려 한다. 그분을 도울 아무것도 없다. 그 발 아래는 깊은 수렁뿐이다. 이제 큰 물이 그분의 머리 위를 덮쳐온다. 물은 아주 깊다. 어떤 구속받은 자도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모든 물을 한 곳(갈보리)에 모으셨으며,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치르기 위해 그 엄청난 심판의 바다를 견디고 계신다. 굽이치는 물결 너머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그분의 절박한 호소가 계속 메아리친다.
69:4
분노한 군중은 악독과 증오와 분함과 냉혹함의 감정들을 드러내며 십자가 앞을 배회한다. 얼마나 기이한 광경인가! 우주의 창조자요 유지자께서 죄인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그분의 살인자들이 그분 앞에 모여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그분께 그 호흡이 달려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까닭없이 그분을 증오한다. 그들은 그분을 멸하려고 거짓말로 그분을 몰아세운다.
69:5
5절은 예수께서 스스로 짊어지는 우리의 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분은 아무 어리석음도 잘못도 없으셨으나 친히 우리의 허물과 슬픔을 짊어지셨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그분의 죄로 말씀하실 정도로 그분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69:6
이어서 그분의 거룩한 마음에 한가지 염려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분은 그분의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사실로 인해 일부 열심있는 신자들이 실족케 되지 않을까 염려하신다. 그 분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하신다. 즉,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그분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는 자는 그분의 낮아지심과 버림받으심으로 인해 욕을 당하게 되지 않도록 기도하신다.
69:7~8
그분이 훼방을 당하고 계신 것은 결국 아버지의 뜻에 대한 그분의 순종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즐거워하는 그분의 마음이 사람들로 그분의 얼굴에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을 퍼붓게 했다. 순종의 부분적인 대가로 그분은 그 모친의 자녀에게 외면당하는 슬픔을 당하셨다. 그분의 이복형제들이 그분을 미치광이로 취급했다.
69:9
주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히셨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해 모욕적인 말을 할 때마다 그분은 그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셨다. 예루살렘에서 그분이 동전 바꾸는 자들을 성전 뜰에서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켰다”는 이 69편 말씀을 기억 했다(요 2:17).
69:10~12
그분이 여기 지상에서 완전한 인간으로서 행하신 일 중 아무것도 그분의 비방자들을 기쁘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분이 금식함으로 그 영혼을 경계할지라도 그들은 흠을 찾아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그분이 경건한 체한다고 비방했다. 그분이 깊은 슬픔에 빠질 때면 동정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말거리가 되었다. 성문에 앉은 지도자들로부터 거리의 술집에 드나드는 술주정뱅이에 이르는 사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분을 조롱하는 노래를 불러댔다. 생명과 영광의 주께서 세상에 임하셨는데 술 취한 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시다니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69:13~18
그리고 다시 한번 그분은 자신의 유일한 근원되신 하나님께 간청한다. 그분의 기도는 얼마나 뜨겁고 간절한지! 그분의 계속적인 호소로 하늘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그분은 하나님께 합당한 때에 응답하실 권리를 내어드린다. 수렁에 빠지시자, 그분은 신실한 도움으로 구출해주시고, 대적에게서 건져주시고, 그리고 깊은 물과 큰물과 웅덩이에서 구원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탄원하신다. 극한 상황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인자와 풍성한 자비에 근거하여 호소한다.
69:19~20
대적에 대한 언급은 그분이 사람들의 손에 당하신 모든 고초를 상기시킨다. 그분의 생애는 훼방과 수치와 능욕으로 가득했다. 유아기부터 그분은 대적에게 쫓김을 당하셨다. 하나님은 대적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셨다. 그분의 마음은 훼방으로 상하셨다. 오직 사람들의 선(善)만을 바라시는 그 마음이 상하셨다. 그 모든 것에 대한 근심과 마음의 무거운 짐이 그분을 낙심케 했다. 슬픔과 고난 중에 있는 그분을 동정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위로할 자를 찾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제자들조차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분은 홀로이셨다.
69:21
이어서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성취된, 다윗의 놀라운 예언 중 하나가 나온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이 예언의 성취는 마태복음 27:34,48에서 발견된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쓸개’는 소량으로 진정제 효과를 낼 수 있는, 쓰고, 아마도 독성이 있는 물질이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대속자로서 완전한 의식 가운데 고난을 당하셔야 했기에 그것을 마시고자 하지 않으셨다. ‘초’는 그분의 갈증을 해소하기보다 오히려 더 심하게 만들 수 있는 신포도주였다.
69:22
22절에서 시의 어조가 갑자기 바뀌는데, 다음 일곱 구절에서 우리는 죽어 가시는 구주께서 하나님께, 자신을 죽게한 민족을 징벌해주실 것을 호소하시는 음성을 듣는다. 이 기도는 우리를 놀라게 할 만한데, 왜냐하면 주 예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신 것을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이다(눅 23:34). 그러나 사실 두 기도 사이엔 모순이 없다. 용서는 그들이 뉘우칠 때만 유효했다.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여기에 묘사된 심판 밖에는 대안이 없었다. 본문은 특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1:9,10에서 이 22,23절을 이스라엘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진(陣)을 의미하는 ‘그 장막’이란 표현도 분명히 유대적인 암시이다.
69:23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실제로 민족적으로 임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소경됨을 가리킨다(고후 3:14). 그들은 빛을 거절한 까닭에 빛을 거부당했다.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릴 것이다. 열방 중에 흩어진 채 그들은 발바닥이 쉴 곳을 찾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떠는 마음과 쇠한 눈과 산란한 정신”을 주실 것이다(신 28:65).
69:24
하나님의 분노가 그들에게 부어질 것이며, 그분의 맹렬한 진노가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그 처참한 유대인 학살과 포로수용소와 가스실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큰 슬픔 중에 기억한다. 물론 그러한 악행은 악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지만, 그러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말한(마 27:25) 백성들의 후손에게 그 일이 임하는 것을 하나님이 막지 않으신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69:25
그들의 거처가 황폐해질 것이며 아무도 그들의 장막에 거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한 마태복음 23:38의 메시야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그 말씀은 A.D. 70년 디도와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을 훼파했을 때 충분히 성취되었다.
69:26
만일 징벌이 가혹하게 여겨지면 그 징벌을 불러온 죄악을 생각해 보라.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포도원의 비유에서 소작인들은 집주인의 아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마 21:38). 그들은 그분이 아들임을 알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죽였다. 26절 후반부는 순교당할 메시야의 추종자들을 묘사한다.
69:27~28
그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구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가혹하다고 지적할 근거가 없게 된다.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회개하고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도행전 기간 내내 우리는 그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받아들이라고 부드럽게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게 된다.
69:29
이제 죽어 가는 죄인의 친구의 마지막 말이 이어진다. 고난과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그분은 하나님의 구원이 자신을 높은데 안전히 두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그리고 그 일은 정확히 이뤄졌다. 하나님이 제3일에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사 그분의 우편에 임금과 구주로 세우셨다. 죄로 인한 그분의 고난은 영원히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즐거워한다! “다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를 칼로 치시지 않으리. 다시는 잔인한 죄인들이 우리의 영광의 주를 멸시하지 않으리.” (로버트 C. 채프먼).
69:30~33
마지막 일곱 구절의 화자(話者)는 부활하신 구속주이시다. 먼저 그분은 자신을 죽음과 무덤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높이겠다고 서원하신다. 그분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할 것이다. 이것이 극히 값진 제물보다 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할 것이다. 그리고 도처의 압제받는 자들 이 여호와께서 구주의 기도를 듣고 그분을 건지셨듯이 곤고한 자의 간구를 듣고 자기를 찾는 갇힌 자들을 자유케 하실 것을 깨닫고 힘을 얻을 것이다.
69:34~36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되는가? 마지막 세 구절은 밝은 미래를 예고해준다. 이스라엘은 비록 일시적으로 제침을 당하지만 축복의 위치로 회복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분을 바라보고 독자를 위해 애곡하듯이 그분을 위해 애곡할 것이다. 그 날에 그들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 고 외칠 것이며, 하나님은 시온을 구원하고 유다 성읍들을 다시 세우실 것이다. 그분의 종들은 다시는 열방 중에 흩어짐 없이 그 땅에 거할 것이며, 그들의 자손이 그 땅을 상속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주 예수께서 메시야-왕으로 다스리고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하게 될 천년왕국을 대망한다.
70편 : 속히 도우소서!
70:1
몰건은 이것을 가리켜 “애절하고 숨가쁜 부르짖음”이라고 표현했는데, 다윗이 여호와께 속히 구원해달라고 호소하는 이 1절에서 우리는 확실히 그런 인상을 받게 된다.
철저히 징벌하소서(70:2,3).
이어서 대적의 패배와 물러감을 호소한다. 그는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하고, 그를 해하기를 기뻐하고, 그의 재난을 조롱한다고 고소한다. 그리고, 그들로 완전히 당황하고 물러가 욕을 당하고 그리고 그들 자신의 극심한 수치로 인해 놀라게 해달라고 구한다.
항상 찬양하게 하소서(70:4).
본문의 요지는, 만일 하나님이 시편 기자를 구원하러 오시면 그분에 대한 큰 찬양의 물결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여호와를 찾는 모든 자는 그분의 도우심을 찬양하고 구원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경배할 기회를 얻게될 것이다.
속히 도우소서(70:5).
다시 한번 속히 도와달라는 가난한 자의 호소가 울려다. 다윗은 비록 확신에 넘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여호와를 그의 도움과 구원자로 믿고 있으며, 그의 그러한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69편 :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69:1~3
여기 69편에서 우리는 죽음에 잠기실 때 주님의 거룩한 영혼이 심히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듣는 특권을 누린다. 물이 그분의 목까지 올라왔으며 그분을 완전히 삼키려 한다. 그분을 도울 아무것도 없다. 그 발 아래는 깊은 수렁뿐이다. 이제 큰 물이 그분의 머리 위를 덮쳐온다. 물은 아주 깊다. 어떤 구속받은 자도 그 깊이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실제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은 모든 물을 한 곳(갈보리)에 모으셨으며, 그분의 사랑하는 아들께서 우리의 죄에 대한 형벌을 치르기 위해 그 엄청난 심판의 바다를 견디고 계신다. 굽이치는 물결 너머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라는 그분의 절박한 호소가 계속 메아리친다.
69:4
분노한 군중은 악독과 증오와 분함과 냉혹함의 감정들을 드러내며 십자가 앞을 배회한다. 얼마나 기이한 광경인가! 우주의 창조자요 유지자께서 죄인의 십자가에 매달려 있다. 그분의 살인자들이 그분 앞에 모여 있다. 그들은 누구인가? 그들은 그분께 그 호흡이 달려있는 자들이다. 그런데 그들이 까닭없이 그분을 증오한다. 그들은 그분을 멸하려고 거짓말로 그분을 몰아세운다.
69:5
5절은 예수께서 스스로 짊어지는 우리의 죄를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분은 아무 어리석음도 잘못도 없으셨으나 친히 우리의 허물과 슬픔을 짊어지셨다. 그분이 우리의 죄를 그분의 죄로 말씀하실 정도로 그분 자신을 우리와 동일시하신다는 것은 놀라운 은혜가 아닐 수 없다.
69:6
이어서 그분의 거룩한 마음에 한가지 염려의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분은 그분의 하나님께 대한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사실로 인해 일부 열심있는 신자들이 실족케 되지 않을까 염려하신다. 그 분은 그렇게 되지 않기를 기도하신다. 즉,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는 그분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로 인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도록, 그리고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찾는 자는 그분의 낮아지심과 버림받으심으로 인해 욕을 당하게 되지 않도록 기도하신다.
69:7~8
그분이 훼방을 당하고 계신 것은 결국 아버지의 뜻에 대한 그분의 순종 때문이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기를 즐거워하는 그분의 마음이 사람들로 그분의 얼굴에 말할 수 없는 수치와 모욕을 퍼붓게 했다. 순종의 부분적인 대가로 그분은 그 모친의 자녀에게 외면당하는 슬픔을 당하셨다. 그분의 이복형제들이 그분을 미치광이로 취급했다.
69:9
주 예수님은 아버지의 집을 위한 열정에 사로잡히셨다. 사람들이 하나님에 관해 모욕적인 말을 할 때마다 그분은 그것을 자기 자신에 대한 모욕으로 받아들이셨다. 예루살렘에서 그분이 동전 바꾸는 자들을 성전 뜰에서 쫓아내시는 것을 보고 그분의 제자들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나를 삼켰다”는 이 69편 말씀을 기억 했다(요 2:17).
69:10~12
그분이 여기 지상에서 완전한 인간으로서 행하신 일 중 아무것도 그분의 비방자들을 기쁘게 하지 못했던 것 같다. 그분이 금식함으로 그 영혼을 경계할지라도 그들은 흠을 찾아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그분이 경건한 체한다고 비방했다. 그분이 깊은 슬픔에 빠질 때면 동정의 대상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말거리가 되었다. 성문에 앉은 지도자들로부터 거리의 술집에 드나드는 술주정뱅이에 이르는 사회 모든 계층의 사람들이 그분을 조롱하는 노래를 불러댔다. 생명과 영광의 주께서 세상에 임하셨는데 술 취한 자들의 조롱거리가 되시다니 이 얼마나 기이한 일인가!
69:13~18
그리고 다시 한번 그분은 자신의 유일한 근원되신 하나님께 간청한다. 그분의 기도는 얼마나 뜨겁고 간절한지! 그분의 계속적인 호소로 하늘 문을 두드린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그분은 하나님께 합당한 때에 응답하실 권리를 내어드린다. 수렁에 빠지시자, 그분은 신실한 도움으로 구출해주시고, 대적에게서 건져주시고, 그리고 깊은 물과 큰물과 웅덩이에서 구원해주실 것을 하나님께 탄원하신다. 극한 상황에서 그분은 하나님의 인자와 풍성한 자비에 근거하여 호소한다.
69:19~20
대적에 대한 언급은 그분이 사람들의 손에 당하신 모든 고초를 상기시킨다. 그분의 생애는 훼방과 수치와 능욕으로 가득했다. 유아기부터 그분은 대적에게 쫓김을 당하셨다. 하나님은 대적이 얼마나 많은지를 아셨다. 그분의 마음은 훼방으로 상하셨다. 오직 사람들의 선(善)만을 바라시는 그 마음이 상하셨다. 그 모든 것에 대한 근심과 마음의 무거운 짐이 그분을 낙심케 했다. 슬픔과 고난 중에 있는 그분을 동정하는 자가 하나도 없었다. 위로할 자를 찾았으나 아무도 없었다. 제자들조차 그분을 버리고 달아났다. 그분은 홀로이셨다.
69:21
이어서 오직 예수님에게서만 성취된, 다윗의 놀라운 예언 중 하나가 나온다. “저희가 쓸개를 나의 식물로 주며 갈할 때에 초로 마시웠사오니.” 이 예언의 성취는 마태복음 27:34,48에서 발견된다.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아니하시더라…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우거늘.” ‘쓸개’는 소량으로 진정제 효과를 낼 수 있는, 쓰고, 아마도 독성이 있는 물질이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대속자로서 완전한 의식 가운데 고난을 당하셔야 했기에 그것을 마시고자 하지 않으셨다. ‘초’는 그분의 갈증을 해소하기보다 오히려 더 심하게 만들 수 있는 신포도주였다.
69:22
22절에서 시의 어조가 갑자기 바뀌는데, 다음 일곱 구절에서 우리는 죽어 가시는 구주께서 하나님께, 자신을 죽게한 민족을 징벌해주실 것을 호소하시는 음성을 듣는다. 이 기도는 우리를 놀라게 할 만한데, 왜냐하면 주 예수께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기도하신 것을 우리가 기억하기 때문이다(눅 23:34). 그러나 사실 두 기도 사이엔 모순이 없다. 용서는 그들이 뉘우칠 때만 유효했다. 마음의 변화가 없다면 여기에 묘사된 심판 밖에는 대안이 없었다. 본문은 특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적용된다는 것을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로마서 11:9,10에서 이 22,23절을 이스라엘에게 적용시키고 있다. 진(陣)을 의미하는 ‘그 장막’이란 표현도 분명히 유대적인 암시이다.
69:23
그들의 눈이 어두워져 보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게 실제로 민족적으로 임한, 하나님의 심판으로 말미암은 소경됨을 가리킨다(고후 3:14). 그들은 빛을 거절한 까닭에 빛을 거부당했다. 그들의 허리가 항상 떨릴 것이다. 열방 중에 흩어진 채 그들은 발바닥이 쉴 곳을 찾지 못할 것이며,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떠는 마음과 쇠한 눈과 산란한 정신”을 주실 것이다(신 28:65).
69:24
하나님의 분노가 그들에게 부어질 것이며, 그분의 맹렬한 진노가 그들을 사로잡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그 처참한 유대인 학살과 포로수용소와 가스실에서 어떻게 성취되었는지 큰 슬픔 중에 기억한다. 물론 그러한 악행은 악인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이지만, 그러나 “그 피를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돌리소서”라고 말한(마 27:25) 백성들의 후손에게 그 일이 임하는 것을 하나님이 막지 않으신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다.
69:25
그들의 거처가 황폐해질 것이며 아무도 그들의 장막에 거하지 않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바 되리라”고 한 마태복음 23:38의 메시야의 말씀을 기억하게 된다. 그 말씀은 A.D. 70년 디도와 로마군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성전을 훼파했을 때 충분히 성취되었다.
69:26
만일 징벌이 가혹하게 여겨지면 그 징벌을 불러온 죄악을 생각해 보라. “대저 저희가 주의 치신 자를 핍박하며 주께서 상케 하신 자의 슬픔을 말하였사오니.” 포도원의 비유에서 소작인들은 집주인의 아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는 상속자니 자 죽이고 그의 유업을 차지하자”(마 21:38). 그들은 그분이 아들임을 알았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죽였다. 26절 후반부는 순교당할 메시야의 추종자들을 묘사한다.
69:27~28
그 사실에 비추어 볼 때 구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가혹하다고 지적할 근거가 없게 된다. “저희 죄악에 죄악을 더 정하사 주의 의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소서. 저희를 생명책에서 도말하사 의인과 함께 기록되게 마소서.”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후에도, 하나님의 성령께서 여전히 이스라엘 민족에게 회개하고 메시야이신 예수님께 돌아오라고 촉구하셨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된다. 사도행전 기간 내내 우리는 그 사랑하시는 이스라엘 민족을 불쌍히 여기시며 그분의 자비와 은혜를 받아들이라고 부드럽게 초청하시는 하나님의 심장의 고동소리를 듣게 된다.
69:29
이제 죽어 가는 죄인의 친구의 마지막 말이 이어진다. 고난과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그분은 하나님의 구원이 자신을 높은데 안전히 두게 해달라고 간구한다. 그리고 그 일은 정확히 이뤄졌다. 하나님이 제3일에 그분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사 그분의 우편에 임금과 구주로 세우셨다. 죄로 인한 그분의 고난은 영원히 끝났다. 그리고 우리는 즐거워한다! “다시는 여호와 하나님이 목자를 칼로 치시지 않으리. 다시는 잔인한 죄인들이 우리의 영광의 주를 멸시하지 않으리.” (로버트 C. 채프먼).
69:30~33
마지막 일곱 구절의 화자(話者)는 부활하신 구속주이시다. 먼저 그분은 자신을 죽음과 무덤에서 건지신 하나님을 높이겠다고 서원하신다. 그분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광대하시다 할 것이다. 이것이 극히 값진 제물보다 더 여호와를 기쁘시게 할 것이다. 그리고 도처의 압제받는 자들 이 여호와께서 구주의 기도를 듣고 그분을 건지셨듯이 곤고한 자의 간구를 듣고 자기를 찾는 갇힌 자들을 자유케 하실 것을 깨닫고 힘을 얻을 것이다.
69:34~36
그러면 이스라엘 민족은 어떻게 되는가? 마지막 세 구절은 밝은 미래를 예고해준다. 이스라엘은 비록 일시적으로 제침을 당하지만 축복의 위치로 회복될 것이다. 그들은 자기들이 찌른 분을 바라보고 독자를 위해 애곡하듯이 그분을 위해 애곡할 것이다. 그 날에 그들은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 고 외칠 것이며, 하나님은 시온을 구원하고 유다 성읍들을 다시 세우실 것이다. 그분의 종들은 다시는 열방 중에 흩어짐 없이 그 땅에 거할 것이며, 그들의 자손이 그 땅을 상속할 것이다. 물론 이것은 주 예수께서 메시야-왕으로 다스리고 이스라엘이 그 땅에 거하게 될 천년왕국을 대망한다.
70편 : 속히 도우소서!
70:1
몰건은 이것을 가리켜 “애절하고 숨가쁜 부르짖음”이라고 표현했는데, 다윗이 여호와께 속히 구원해달라고 호소하는 이 1절에서 우리는 확실히 그런 인상을 받게 된다.
철저히 징벌하소서(70:2,3).
이어서 대적의 패배와 물러감을 호소한다. 그는 그들이 그를 죽이려 하고, 그를 해하기를 기뻐하고, 그의 재난을 조롱한다고 고소한다. 그리고, 그들로 완전히 당황하고 물러가 욕을 당하고 그리고 그들 자신의 극심한 수치로 인해 놀라게 해달라고 구한다.
항상 찬양하게 하소서(70:4).
본문의 요지는, 만일 하나님이 시편 기자를 구원하러 오시면 그분에 대한 큰 찬양의 물결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이다. 여호와를 찾는 모든 자는 그분의 도우심을 찬양하고 구원의 하나님이신 그분을 경배할 기회를 얻게될 것이다.
속히 도우소서(70:5).
다시 한번 속히 도와달라는 가난한 자의 호소가 울려다. 다윗은 비록 확신에 넘친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여전히 여호와를 그의 도움과 구원자로 믿고 있으며, 그의 그러한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