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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시편 83-84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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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5월 28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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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편 83-84편 연구

83편 : 6일 전쟁의 시

1967년 5월 28일, 아랍공화국 대통령 가말 압들 낫세르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이스라엘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할 계획이다. 이번은 전면전이 될 것이다. 우리의 기본 목표는 이스라엘의 멸망이다.” 6월 5일 전쟁이 발발할 당시 아랍공화국에는 요르단, 시리아, 이라크, 알제리아, 수단, 쿠웨이트, 사우디아라비아 및 모로코가 가담했다. 이들 연합군의 이스라엘을 바다로 내몰려는 시도는 실패했다. 6일만에 전쟁은 끝났다. 이스라엘이 논란의 여지없이 승리했다. 이 6일 전쟁 후에 여러 성경학자들에게 시편 83편은 새로운 의미를 띠게 되었다. 그리고 아마도 이 시는, 주 예수께서 왕으로 다스리기 위해 강림하심으로 이스라엘의 그 땅에 대한 권리 주장이 돌이킬 수 없이 확고해질 때까지 계속해서 성취될 것이다.

83:1~5

이 기도는 포위당한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침묵을 깨고 일어나 결연히 행할 것을 호소하는 기도임이 분명하다. 백성들은 그들 자신의 안전과 보존을 위해 호소하면서 그들의 문제를 하나님의 문제인양 아뢰고 있다. “주의 원수가…주를 한하는 자가…주의 백성을…주의 숨긴 자를…주를 대적하여….” 그들은 이스라엘의 대적이 곧 그분의 대적임을 하나님이 잊지 않으시게 하고자 했다. 세부 내용들은 실제상황에 잘 부합한다.
대적이 훤화했다-적군의 살기등등한 위협을 생생히 묘사해준다.
그들은 간계를 꾀했다-러시아 고문단이 배후조종을 했다.
그들은 함께 의논했다-오늘날 아랍정상회담으로 알려진 회의이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멸절을 위협했다-위의 인용문이 증거하는 바다.
그들은 가공할 연합세력을 결성했다-대부분이 이스라엘 인근 국 가들이다.

83:6~8
이들 국가들을 현대국가와 일치시키려 할 때 우리는 난관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앗수르가 오늘날의 이라크이며, 아브라함과 하갈의 후손인 이스마엘 인이 아랍의 조상임을 알고 있다. 우리는 에돔과 아말렉이 에서의 후손이며, 모압과 암몬이 롯의 후손임을 알고 있으나, 그들을 오늘날 추적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블레셋 인은 오늘날 가자 지구(地區)로 잘 알려진 지역에 거주했다. 두로 성은 오늘날의 레바논 지역에 위치했다. 그발은 페니키아(뵈니게)에 위치한 구블라 내지 비블로스와 동일하다. 어떤 자료는 하갈인을 하갈의 후손으로 분류하여 이스마엘의 계보에 속한 자들로 보지만, 그러한 분류는 그다지 긍정적으로 볼 수 없다. 이 이름들은 여러 면에서 그 배경이 모호한 까닭에 그것들을 오늘날의 중동 국가들과 연결 지으려 하기보다는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이방 국가들 시편을 대표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어떻게 작은 이스라엘이 가공할 연합세력과 맞설 수 있었을까? 하나님의 백성은 그분의 ‘보호받는 자’(3절, 우리말 성경에는 ‘주의 숨긴 자’로 되어 있음; ‘소중한 자’[LB], ‘사랑하는 자’[Gelineau])라 는 사실에서 그 부분적인 답을 얻을 수 있다. 위기의 순간에 그분은 기적적으로 그들을 보호하시며, 그들의 약함을 통해 그분의 강함을 온전케 하신다. 적군이 모두 그들을 대적할 때 그분은 모든 인간적인 설명을 거부하는 승리를 보내신다.

83:9~10
이제 포위당한 이스라엘이 여호와께, 과거에 세 경우에 대적을 물리치셨듯이 현재의 위협을 제거해달라고 호소한다. 가나안 왕 야빈과 그 군대장관 시스라는 기손 강에서 참담한 패배를 당한 후 엔돌에서 모욕적인 죽임을 당했다(삿 4장). 그들의 시체는 이스라엘 땅의 퇴비가 되었다.

83:11~12
미디안의 두 방백인 오렙과 스엡은 죽임과 목 베임을 당했다(삿 7:23~25). 이사야에 의하면(10:26) 그것은 길이 기억될 살육이었다. 미디안의 두 왕인 세바와 살문나는 ‘하나님의 목장’을 차지하겠다고 위협한바 있었다. 그들은 오렙과 스엡이 죽임당할 때 이스라엘군의 손을 용케 피했으나 곧 붙잡혀 기드온에서 처형당했다(삿 8장).

83:13~18
그분의 대적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담대히 호소하면서 이스라엘은 가능한 모든 상상을 동원했다. 징벌의 세부내용이 구체적으로 밝혀져 있다. 그들로 굴러가는 검불 같게, 혹은 어떤 이의 표현대로, 흔들리는 갈대 같게 하소서. 그들로 바람에 날리는 초개같게 하소서. 그들로 삼림이 불에 살라지듯 쫓겨나고, 화염에 타듯 소멸되게 하소서. 그들로 주의 폭풍으로 두려워 떨게 하소서. 그들로 완전히 수치를 당하게 하사 주를 찾게 하소서. 그들로 수치 중에 망하게 하사 사람들로 여호와만이 온 땅의 주재이심을 알게 하소서. 강한 표현이라고? 그렇다. 강하면서 근거가 확실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영예가 위기에 처할 때 사랑은 견고해질 수 있다. 몰건은 이렇게 설명한다. “이 옛 백성의 노래하는 자들은 한결같이 하나님의 영예를 위하는 열정에 크게 사로잡혔다. 그들에게는, 선지자들의 경우처럼, 이기적인 동기라는 것이 일절 없었다. 이기심은 아무 노래도 못 부르며, 아무 환상도 보지 못한다. 반면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열정은 깊은 부드러움과 깊은 강직함을 겸비할 수 있다.”

84편 : 하늘 본향을 향한 그리움!

84편의 우선적인 ‘해석’에 대해서는 아무런 의문이 없다. 그것은 추방당한 유다 백성이 예루살렘 성전에 다시 돌아가기를 원하는 깊은 열망을 토로하고 있다. 또한 이 시는 지역교회의 사귐의 자리에 참석하는데 방해받고 있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과 모여 함께 주님을 예배할 수 있는 상황으로 돌아가기 위해 가슴을 태우고 있다. 그러나 내가 가장 좋아하는 적용은 하늘 본향에 대한 그리움으로 마음에 병이 든 경건한 순례자에 이 시를 적용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이 시를 한번 살펴보기로 하자.

84:1~2
어떤 곳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곳에 비교되겠는가! 그곳은 비할 데 없는 아름다움과 독특한 장려함과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움의 장소이다. 그러나 그 점에 대해 분명히 해두자. 그 ‘장소’가 환유(換喩)법으로 알려진 수사법을 통해, 그곳에 거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라고 시편 기자가 말할 때 그는 사실 여호와 그분과 함께 있기를 열망하고 있었다. 그는 바로 이어서 “내 마음과 육체가 생존하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라고 고백한다.

84:3
순례자는 자기 자신을 참새와 제비에 비유한다. 다른 시에서 참새는 외로움을 말해주는 상징물로 사용되고 있다. “…지붕 위 에 외로운 참새 같으니이다”(102:7). 그리고 참새를 관찰해본 적이 있는 사람은 그것이 바람결에 이리저리 쓸리는 힘없는 미물(微物) 이라는 것을 잘 안다. 참새와 제비는 이 광야에 머물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을 적절히 묘사해준다. 그들은 외롭고 나약하다. 그들이 그들 자신과 그들의 가족을 위해 안식과 안전을 찾을 수 있는 곳은 여호와의 단 뿐이다. 성막과 성전에는 두 개의 단이 있었다. 하나는 놋단이고 하나는 금단이었다. 놋단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금단은 그리스도의 부활을 상징했다. 그 둘은 우리 구주의 완성된 사역을 말해준다. 그곳이 우리 영혼이 참새처럼 안식할 수 있는 곳이며, 그곳에서 우리는 우리의 자녀들도 안식을 찾도록 인도할 수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 16:31).

84:4
이어서 거룩한 시기심이라고 부를 만한 마음을 토로하며 이 추방자는 “주의 집에 거하는 자가 복이 있나이다. 저희가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라고 고백한다. 이와 같이 주님과 함께 있기 위해 본향에 간 사랑하는 이들의 행복함을 생각할 때 우리는 그들을 슬퍼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상실이지만 그들에게는 영원한 얻음이다. 그들은 우리보다 훨씬 행복하다.

84:5
5~7절에서 우리는 이미 하늘에 있는 자들의 축복에서 그 곳으로 가는 여정에 있는 자들의 보다 적은 축복으로 눈길을 돌린다. 그들에 대해서 여러 가지 사실이 언급되어 있다. 먼저, 그들의 힘은 그들 자신이 아니라 여호와께 있다. 그들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 안에서” 강하다(엡 6:10). 그리고, 그들의 마음에는 시온으로 향하는 대로가 있다. 세상은 그들의 본향이 아니다.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마음은 순례여정에 고정되어 있다.

84:6~7
세 번째는,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 그곳을 샘으로 변화시킨다는 것이다. 그 굴복을 모르는 영혼들은 슬픔의 와중에도 노래하며 눈물 속에서도 무지개를 그려낼 수 있다. 그들은 비극을 승리로 바꾸며 불행을 더 큰 행복의 디딤돌로 사용한다. 그 들이 환경을 이겨내는 비결은 “비도 그것을 못으로 입히나이다”(우리말성경에는 ‘이른 비도 은택을 입히나이다’로 되어 있음-역주)라는 다음 문구에서 발견된다. ‘비’는 일반적으로 성령의 상징물로 받아들여지는데, 여기서는 광야 여행자들을 위해 맑고 시원한 물을 공급하는 성령의 소성케 하는 사역을 암시한다. 물은 하나님의 말씀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엡 5:26의 경우처럼). 이것이 어떻게 “그들이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는지”를 설명해준다. 그들은 광야를 지나는 동안 점점 허약해지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강건해진다. 겉 사람은 후패하지만 속 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는 것이다(고후 4:16). 이어서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라는 확신에 찬 놀라운 고백이 나온다. 의문의 여지가 없이, 광야 여정은 마침내 영광 중에 계신 왕을 뵈옵는 기쁨으로 절정에 이를 것이다. 이제 시편 기자는 감동적인 기도를 터뜨린다. 먼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를 일컬으며, 그 다음에는 야곱의 하나님을 일컫는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로서 그분은 수많은 천사의 무리를 다스리신다. 야곱의 하나님으로서 그분은 무가치한 자의 하나님, 사기꾼의 하나님이시다. 생각해 보라! 무수한 천사들에게 둘러싸여 찬양을 받으시는 하나님이 또한 지렁이 같은 야곱의 하나님이시다. 무한히 높으신 분이 또한 아주 가까이 계신다. 그런 까닭에 여러분과 내가 항상 그분의 임재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84:9
우리는 어떤 자격으로 그곳에 들어가는가?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의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보옵소서.” 우리가 받아들여지는 것은 오직 주 예수님의 위(位)와 사역을 통해서이다. “하나님은 내 구주를 보신 다음 나를 보시네. 나는 사랑하시는 자 안에서 열납되고 자유케 되었네.”

84:10
하늘에 있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그분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낫다. 다시 말해서, 아무 비할 것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계신 곳에 머무는 영광과 기쁨과 아름다움과 자유는 가히 상상할 수 없다. 상상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로서는 바람직하다. 그렇지 않다면 아마 우리는 마음이 들떠 이곳에 머무르거나 주어진 일에 충실하기가 힘들 것이다. 악인의 장막에 거하는 것보다 당신의 하나님 전의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다. 스펄젼의 표현대로, “하나님의 최악이 사단의 최선보다 낫다.” 더 나을 뿐 아니라 더 영구적이다. ‘우리 하나님의 전’과 ‘악인의 장막’의 차이를 보라. 전자는 영구적인 거처이나, 후자는 잠시 치웠다 거두는 것이다.

84:11
여호와 하나님은 어두움 속에 빛을 제공하는 해요, 광야 여정 중에 뜨거운 열기를 막아주는 방패이시다. 여호와께서는 여정 중에 필요한 순간마다 은혜를 주실 것이며, 여정이 끝나 그분의 구속받은 자녀들을 그분의 영원한 본향으로 맞아들이실 때 그들에게 영광을 주실 것이다. 사실 순례자는 이 땅과 천국에서 아무 부족이 없을 것인데, 이는 그분이 정직히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어떤 것이 우리에게 좋은 것이면 그분은 그것을 아끼지 않고 주실 것이다. 만일 그분이 어떤 것을 주기를 꺼리신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좋지 않은 것이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롬 8:32).

84:12
시편 기자가 감격한 마음으로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라고 외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 외침에 우리 마음도 이렇게 반응한다. “그렇습니다. 주님, 나를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주셔서 영원히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