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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시편 85-86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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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5월 31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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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5-86편 연구

 시편 85편 : 우리를 다시 소성케 하소서!

이 부흥(소성)을 위한 기도는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알기 쉽게 나눠진다.
이스라엘이 소성함을 입은 과거의 예(1~3절).
다시 소성케 해달라는 호소(4~7절).
여호와의 응답을 기다림(8,9절).
장래 회복에 대한 약속(10~13절).
여기에 묘사된 회복이 정확히 어떤 사례인지를 밝히기는 불가능 하다. 이 시가 고라 자손의 작품인 점으로 보아 바벨론 포로에서 회복된 일을 가리킬 리는 없는데, 왜냐하면 고라 자손은 그 오래 전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사례를 밝히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진정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회복을 이루셨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전에 그렇게 하셨다면 앞으로도 다시 그렇게 할 수 있으시다는 것이다.

85:1~3
부흥은 여기서, 여호와께서 그 땅에 은혜를 베푸시고 야곱의 소유를 회복시키신 때로 묘사되어 있다. 세 가지 조치가 부흥을 가져오게 했다. 첫째는 죄의 자복이었다. 여기에 명확히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죄의 자복은 다른 것들이 행해지기 전에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도덕적인 필수요건이다. 둘째는 그분의 백성의 죄악을 용서한 것이고, 셋째는 하나님의 진노가 돌이켜진 것이다.

85:4
이 과거에 있었던 하나님의 용서의 자비가 다시 그것을 베풀어달라는 호소의 근거가 된다. 믿음은 지난 역사로 만족하지 않고 현재의 사건에서 하나님을 경험하기를 원한다. 시편 기자는 자신이 직접 자복하지는 않지만 “우리를 돌이키시고”라는 기도를 통해서 자신도 자복에 포함되었음을 암시한다. 회복을 일으키실 때 하나님은 먼저 그분의 백성을 회개시킨 다음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런 다음 그분의 진노로 말미암은 징벌을 그치신다.

85:5
여호와를 떠나 있는 시간은 영원한 불행처럼 보인다. 더군다나 5절의 간곡한 호소는 오랜 핍박과 분산을 겪어온 이스라엘 백성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주께서 우리에게 영원히 노하시며 대대에 발분하시겠나이까?”

85:6
영적인 하강은 반드시 기쁨의 상실을 가져온다. 사귐이 깨어졌다는 것은 신자의 노래가 사라진 것을 의미한다. 기쁨은 자백 되지 않은 죄와 공존할 수가 없다. 따라서 여기에 “우리를 다시 살리사 주의 백성으로 주를 기뻐하게 아니하시겠나이까?”라는 기도가 하늘로 올려지고 있다. 성령의 새롭게 하심은 다시금 기쁨의 종소리가 울리게 한다. 모든 위대한 부흥에는 노래가 뒤따랐다.

85:7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을 회복시키실 때 그분의 자비가 은혜로이 나타난다. 우리에 대한 그분의 다른 섭리들도 마찬가지다. 우리를 징계하는 것도, 우리를 훈련시키는 것도, 우리를 바로잡고 마침내 우리를 돌이키시는 것도 모두 그분의 사랑이다. 방황과 침체와 불순종 가운데 있는 우리를 참으시는 그분의 사랑은 얼마나 한결같은지! 여호와의 사랑 같은 사랑은 없다. 그리고 부흥은 여호와의 구원(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영혼 구원이 아니라 신실치 못함의 모든 결과, 즉 분산과 포로됨과 고난과 무력함과 불행으로부터의 구원이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85:8~9
회복을 구하는 호소를 은혜의 보좌 앞에 올린 후에 시편 기자는 평안한 응답이 오되 속히 올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응답을 기다린다. 그의 확신은, 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마음을 그분께로 돌이키는 자들에게 항상 화평을 말씀하시며, 망령된 데로 돌아가지 않고 그분을 경외하는 자들을 구원하신다는 사실에 기초한다. 여기에 언급된 ‘영광’은 영광의 하나님을 가리키는 의미로 사용된 것이며, 그 의미는, 여호와께서는 그분의 백성이 그분과 사귐을 가질 때 그들 중에 거하신다는 것이다.

85:10
부흥을 바라는 기도의 응답이 마지막 구절들에 주어져 있다. 본문은 주 예수께서 장차 올 영광의 시대에 회복된 이스라엘을 다스리실 때 전개될 목가적(牧歌的)인 상황을 묘사해준다. 그러나 보다 넓은 의미로 말하면, 본문은 부흥의 불길이 타오를 때는 항상 이러한 모습이 될 것을 말해준다. “긍휼과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인간의 삶에서는 진리를 견고히 고수하다보면 으레 사랑과 긍휼이 제한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진리의 모든 요구사항이 십자가에서 주 예수님에 의해 충족된 까닭에 그분의 백성에게 그분의 변함없는 사랑을 쏟아 부으실 수 있다. 같은 의미에서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다.” 하나님의 공의의 모든 요구가 구주의 대속 사역을 통해 이뤄진 까닭에 신자들은 하나님과 화평을 누릴 수가 있다. “우리의 죄가 예수님의 머리에 놓였고 그분의 피로 우리의 빚이 갚아졌네. 엄격한 공의는 더 이상 요구할 수 없고 긍휼이 넘치도록 베풀어지네.” (알버트 미들레인).

85:11~13
진리 혹은 진실함은 땅에서 솟아날 것이며, 의는 하늘에서 하감할 것이다. 신자가 그분의 영원한 연인에게 충성할 때 하늘은 여러 배의 축복으로 의롭게 반응한다. 그분의 말씀에 늘 신실 하신 여호와께서 좋은 것을 주신다. 그분은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않으신다(시 84:11). 가뭄과 기근이 그치고 그 땅은 풍성한 곡식을 생산한다. 여호와께서 그분의 땅을 방문하실 때, 그분은 그 의로운 삶으로 그분의 오심을 도덕적으로 대비한 백성 중에 행하신다.

86편 : 이유가 첨가된 기도

이 시에서 주목할 한가지는 다윗이 간구이든 찬양이든 거의 모든 고백에 이유를 붙이고 있다는 점이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다.

86:1
간구: “여호와여 들으소서.”
이유: 곤고하고 궁핍하므로

86:2(상)
간구: 보존하소서(4,16절에 ‘종’으로 나온다).
이유: 경건한 자이므로

86:2(하)
간구: 구원하소서.
이유: 뚜렷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내 주 하나님이여’란 문구에 암시되어 있는 듯하다.

86:3
간구: 긍휼히 여기소서.
이유: 온 종일 부르짖으므로

86:4
간구: 기쁘게 하소서.
이유: 주만 바라봄으로

86:5
이유: 이 구절은 앞선 간구에 대한 추가적인 이유를 제시한 것이거나 6절의 기도와 짝을 이룬 것일 수 있다. 그분을 부르는 모든 자에게 여호와의 선하심과 즐겨 사유하심과 긍휼이 베풀어진다.

86:6
간구: 여호와여 들으소서.

86:7
간구: 환란 날에 도우소서.
이유: 하나님이 기도를 듣고 응답하시므로 시편 기자는 이어서 찬양으로 전환한다.

86:8
찬양: 여호와의 어떠하심과 하신 일의 놀라움에 대해.

86:9
찬양: 그분이 모든 열방에게 경배받기에 합당한 당하심으로 인해(이것은 천년왕국에서 성취될 것이다).

86:10
이유: 하나님은 위대하고, 그 행사는 놀랍다. 다른 신은 없다.

86:11
간구: 주의 도로 가르치소서.
이유: 하나님의 진리에 순종 하기 위해 마음을 온전히 바쳤으므로.

86:12~13
찬양: 여기서 다윗은 그의 전존재로 여호와를 찬양하고 그분의 이름을 영원히 영화롭게 하리라는 마음을 표현한다.
이유: 그를 음부 깊은데서 건져내신 하나님의 크신 긍휼로 인해. 만일 우리가 이 시를 메시야에게 적용한다면 이것은 그분의 부활을 가리킨 표현일 것이다.

86:14~16
나머지 구절들은 시편 기자의 임박한 위험을 묘사한다. 교만하고 강포한 무리가 그의 생명을 취하려고 음모를 꾸몄다. 그들은 하나님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다윗은 여호와를 알았으며, 이 중요한 순간에 그는,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시다는 지식 안에서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에 그는 담대히 여호와께, 그에게 돌이키사 그를 강하게 하고 그를, 즉 주의 여종의 아들을 구원해달라고 간구한다. 어떤 이들은 “주의 여종의 아들”이란 표현을, 여종의 아들의 경우와 같은 ‘주의 소유’를 뜻하는 비유로 이해한다. 이 시를 메시야시로 이해하는 이들은 ‘주의 여종의 아들’을 아마도 동정녀 를 가리키는 표현으로 간주한다.

86:17
끝으로 시편 기자는, 여호와께서 그분의 은총에 대한 분명 한 표증을 주시기를 간구한다. 그렇게 하면, 그들이, 하나님이 다윗을 돕고 위로하신 것을 보고 자기들의 처지가 불리한 줄을 깨닫게 될 것이다. 처음에 우리는, 이 시가 그 대부분의 기도와 찬양에 이유가 첨가 된 특징이 있다는 것을 언급한바 있다. 그 외에 두 가지 특징을 더 언급할 수 있는데, 첫째로, 다윗은 다른 성경구절을 풍성히 인용하고 있다. 사실 그는 거의 대부분을 다른 성경구절을 인용하여 기도 나 찬양을 하고 있다.

둘째로, ‘아도나이’란 하나님의 이름이 일곱 번 사용되고 있다(3,4,5,8,9,12,15절에 ‘주’로 옮겨져 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들은 종종 여호와라는 이름보다 이 이름을 사용했다. 고대의 성경보관자들은 ‘여호와’라는 감히 일컫기 어려운 이름에 대한 극도의 경외심 까닭에 성경을 크게 낭송할 때 여호와라는 이름을 134번 아도나이로 바꿔 불렀다. ‘일심으로’ 주를 경외하게 해달라는 부분(11절)에 대해서 F. W. 그랜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이 실로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크게 결여되어 있다. 우리의 삶은 적극적인 죄악에 소모되지는 않지만,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증거의 효력을 실추시키는 사소하고 잡다한 일에 얼마나 낭비되고 소모되는지! 사도 바울처럼 ‘오직 한(가지)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는 몇이나 될는지! 우리는 길을 걷고 있다. …하지만 중간에 멈추어 꽃 사이를 날아다니는 나비를 쫒다가 아무 이렇다 할 진보를 보지 못한다. 우리가 ‘세상 나라들과 그 영광’으로부터는 등을 돌리지만, 아이들이 쫓다가 지치고 마는, 또한 우리가 그것을 보고 피식 웃어버리는 엉겅퀴 털보다도 가벼운 사소한 일들에 아무 생각 없이 우리 자신을 바치는 것을 보고 사단은 얼마나 의아해하겠는가! 우리의 삶을 주의 깊게 관찰해보자. …얼마나 우리는 유일한 유익한 것에서 끊임없이 우리의 초점을 흐리게 하는, 불필요한 걱정과 스스로 상상해낸 의무들과, 느슨하게 허용된 편안한 생활과, ‘아무 잘못 없는’ 사소한 일들에 휩싸여있는지! 그들의 삶의 기록되지 않은 역사를 채워가면서 매일 매일 그러한 시험에 직면하기를 주의하는 사람은 몇이나 될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