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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시편 87-88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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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6월 01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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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87-88편 연구

87편 : 왕의 인구조사에 대한 시

예루살렘 시장 테디 콜렉과 그의 동료 저자는 그들의 4천 년 된 고성(古城)의 중요함에 대해 이렇게 경이감을 표현했다. “고고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예루살렘이 왜 그곳에 세워졌으며, 또 왜 그렇게 중요한 곳이 되었는지 오랫동안 궁금하게 여겨왔다. 그곳은 세계의 다른 중요한 도시들의 발전과 번영을 가능케 한 외관상의 특징이 전혀 없다. 그곳은 아무 큰 강이 흐르지 않는다. 그곳은 큰 항구가 바라다 보이지 않는다. 그곳은 대로와 교차로가 지나지 않는다. 그곳은 한 샘이 어느 정도 물을 공급해주긴 하지만, 종종 도시가 정착되는 주된 이유인 풍부한 수자원(水資源)이 가까이 있지도 않다. 그곳은 풍부한 광물도 없다. 그곳은 주요 무역로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다. 그곳은 고대 제국들이 광활한 지역을 정복하기 위한 전략적 요충지도 아니었다. 그곳은 실로 특별한 경제적 장점이나 지형적 장점이 없었다. 만일 그러한 장점이 있었다면 오래 전에 사라진 당시의 대부분 마을들의 운명과는 다른 운명을 지닌 작고 이름 없는 산지 마을(예루살렘의 작은 규모를 가리킴-역주) 보다는 더 규모가 컸을 것이다.”

87:1~3

그곳이 중요해진 이유는 물론 하나님께 택함 받았기 때문이다. 그분은 거룩한 산에 예루살렘을 세우셨으며, 그 땅의 다른 어떤 성읍이나 마을보다 예루살렘의 문들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가장 큰 영광은 여전히 미래(그곳이 메시야 왕국의 수도, 즉 오래 고대하던 왕의 도성이 될 때)에 있다. 이 시는 하나님의 성 시온을 가리켜 영광스럽다고 말할 그 날을 대망한다. 여기에는 그곳이 많은 열국의 영적인 출생지가 될 것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말일에 여호와의 전의 산이 모든 산꼭대기에 굳게 설 것이요, 모든 작은 산 위에 뛰어나리니, 만방이 그리로 모여 들 것이라. 많은 백성이 가며 이르기를, 오라 우리가 여호와의 산에 오르며 야곱의 하나님의 전에 이르자. 그가 그 도로 우리에게 가르치실 것이라. 우리가 그 길을 행하리라 하리니, 이는 율법이 시온에서부터 나올 것이요 여호와의 말씀이 예루살렘에서부터 나올 것임이니라”(사 2:2, 3).

87:4

그것이 4절에서 염두에 둔 듯한 내용이다. 시온이, 그를 어미로 아는 나라들 중 남쪽의 라합(즉, 애굽)과 북쪽의 바벨론을 안다고 말하고 있는 것으로 의인화되어 있다. 또한 사람들이 블레셋과 두로와 구스(에디오피아)를 예루살렘에서 났다고 말할 것이다. 그들은 시온을 세계의 영적 정치적 경제적 수도로 인정하는 나라들에 포함될 것이며, 그곳으로 예배드리러 올라가 큰 임금께 예물을 바칠 것이다(사 60:5~7). 초막절을 지키러 올라가기를 거절하는 나라들은 가뭄과 재앙을 당할 것이다(슥 14:16~19).

87:5

그러므로 시온은 열방이 영적인 재 출생을 경험하는 곳으로 인정될 것인데, 이는 지존자께서 친히 온 세상을 다스리는 그곳에 시온을 세우실 것이기 때문이다.

87:6

그리고 여호와께서 민족들의 수를 세실 때 그분은 어떤 나라들이 시온의 시민이 되는 참된 목적을 깨닫고 있음을 주목하실 것이다. 그들이 수도를 방문한 목적은; “그 구조에 감탄하거나 그 전쟁을 구경하거나 그 성에 예배드리러 올라온 지파들을 시기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 도시의 특전을 주장하고 그 보호를 경험하고 그 법을 순종하고 그 행복한 사회에서 삶과 사랑을 나누고 그리고 그  영광스런 건축자이자 인도자 되신 분과 더불어 사귐을 갖기 위함이다.” 게벨라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열방이 하나씩 그 나라로 인도되어 시온의 영광과 축복으로 들어갈 때 여호와께서 그 이름을 기록하신다. 그 때에 시온은 전 세계의 영광스런 수도가 된다.”

87:7

그 때는 축제와 절기의 때가 될 것이다. 노래하는 자들과 춤추는 자들이 함께 “나의 모든 근원이 네게 있다”고 환호할 것이다. 예루살렘은 더 이상 눈물과 환란의 곳이 아니라, 축복과 소성함의 근원이요, 땅의 모든 열국의 영적인 고향이 될 것이다. 이 시를 마치기 전에 한가지 개인적으로 적용할 점은 이러하다. 하나님이 사람들을 등록하실 때가 올 것이다. 그것은 하늘 시민의 인구를 조사하는 일이다. 유일한 중요한 자격요건은 새로운 출생이다. 거듭난 자들만이 하나님 나라를 보거나 들어갈 것이다(요 3:3~5). 하나님이 사람들을 등록하실 때 그분은 “이 사람이 이러이러한 곳에서 거듭났다”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분이 당신에 대해서도 그렇게 말씀하실 수 있을까? 당신이 하늘 시민의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 방법이 요한복음 1:12에 진술되어 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88편 : 가장 슬픈 시

88편에서 우리는 인간의 슬픔과 고난의 밑바닥에 이르게 된다. 여기서 시편 기자는 자신의 곤경을 묘사할 암울한 표현을 찾아 헤매는 듯하다. 그는 분명 극한 상황에 처해 있다. 그는 마치 자신이 불치환자를 위한 격리병동에 있는 듯한 느낌이었다. 남은 것이라곤 시체안치소뿐, 이제 그의 얼굴에 천이 덮어지고 그의 시신이 옮겨 지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88:1~2

이 시에서 유일하게 밝은 지점은 “여호와 내 구원의 하나님이여”라고 서두에 언급된 하나님의 이름뿐이다. 게벨라인은 그 것을 가리켜, 먹구름 사이를 헤치고 비추는 한줄기 빛과 칠흑 같은 어두움을 뚫고 빛을 발하는 별빛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즉시로 시편 기자는 자신의 절망적인 처지를 슬퍼하는 묘사에 빠져든다. 밤낮 여호와께 부르짖고 있으나 아무 응답이 없다. 언제나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듣고 뭔가 조치를 취하실는지?

88:3~7

그의 생명은 무수한 환란으로 끓어오르며, 그는 죽음과 무덤을 향해 무기력하게 나아간다. 그는 죽은 것으로 포기되었으며 이미 죽은 자로 간주되었다. 모든 기력이 빠져나갔다. 이제 그는 시체가 널린 전쟁터의 한 의식불명의 군사처럼, 혹은 사람의 눈에 띠지 않는 무덤에 다른 사람과 함께 매장된 전사자처럼, 죽은 자 가운데 던져졌다. 그는 자신이 하나님에게 잊혀 졌으며 따라서 하나님의 도움을 받을 희망이 끊어졌다고 느꼈다. 지하감옥에 갇힌 포로처럼 그는 하나님에 의해 깊은 웅덩이, 어두운 곳, 음침한 곳에 던져졌다. 그는 한가지 설명밖에는 가능하지 않다고 느꼈는데, 그것은, 하나님이 그에게 분노하셨으며 그는 하나님의 심판의 엄청난 파도에 삼킨 바 되었다는 것이다.

88:8~9

그를 아는 자들도 그를 마치 문둥병자처럼 버렸다. 그들은 그를 가증한 것처럼, 혹은 ‘저주받은 것처럼’(Knox) 대했다. 그는 피할 곳 없는 공간에 갇혔다. 이전엔 밝고 총총했던 그의 눈은 모든 빛을 잃었다. 그리고 기도는 아무 소용없는 듯했다. 날마다 손을 들고 여호와께 간절히 부르짖었으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88:10

이어서 그는 일련의 질문을 통해, 자신의 죽음이 그분께 무슨 유익이 있을 것인지 말해달라고 하나님께 도전했다. 이 질문은 구약 성도들이 죽음과 내세에 대해 지식이 불완전했음을 드러내 주는 한편, 우리로 하여금 죽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더 좋은 것이라는 확신에 대해 무한히 감사하게 한다(빌 1:23). 이어서 이러한 질문이 던져진다. 죽은 자들에게 하나님이 기사를 행하시겠는가? 그에 대한 암시된 답은 ‘아니다’이다. 율법 아래 사는 유대인에게 죽음은 아무 생산 적인 일도 일어나지 않는 알 수 없는 망각의 영역이었다. ‘유혼(幽魂)’이 일어나 하나님을 찬양하겠는가? 죽은 자들은 여호와를 찬양할 아무 방법이 없는 유령같은 존재로 간주되었다.

88:11~12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을 무덤에서, 그분의 신실함을 멸망의 장소에서 선포할 수 있을까? “음부의 어둡고 침침한 공간에서는 어떤 행동이나 말도 할 수 없다고 믿었으므로, 그들은, 찬양으로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자들을 가급적 오래 살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관심사였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88:13~18

시편 기자는 새롭게 힘을 얻은 것처럼 여호와와 변론을 벌인다. 살아있는 한 그는 아침마다 간절한 기도를 올릴 것이다. 그는 하나님이 그를 그토록 철저히 버리시고 아무 동정이나 호의의 빛도 보이지 않으시는데 대해 당혹감을 토로했다. 어릴 적부터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제 하나님의 두렵게 하심의 절정에 달하여 그는 황망하고 절망적이었다. 하나님의 두려운 진노가 밀물 처럼 그를 삼켰으며, 그분의 두려우심을 인해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맹렬한 홍수가 그를 에워싸고 줄어들 줄 몰랐다. 파도가 그를 단숨에 삼키려고 밀려들었다. 마치 하나님이 사랑하는 자와 친구로 하여금 그를 버리게 하신 듯했다. 그의 친구는 어두움뿐이었다. 이렇게 해서 이 가장 슬픈 시는 마감한다. 왜 이 시가 성경에 포함되었는지 궁금하다면, J. N. 다비의 말을 한번 들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말하기를, 한 때 이 시가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을 준 유일한 성경말씀이었는데, 왜냐하면 그렇게 낮아진 사람을 그가 직접 보았기 때문이었다고 했다. 클라크는 출처를 알 수 없는 한 자료를 인용하고 있다. “성경에서 이 시처럼 경험의 소중함을 말해주는 말씀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또한 이 시는 어떤 극한 상황에 처한 자에게도, 하나님이 그를 버리지 않으신다는 확신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