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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시편 91-92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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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6월 03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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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91-92편 연구

91편 : 나의 시

1922년, 웨스턴 히브릿지에서 5살난 아이가 디프테리아로 죽어 가고 있었다. 점액막이 목구멍에 형성되어 점점 숨쉬기가 어려워지고 있었다. 그의 그리스도인 어머니는 차마 아들이 마지막 숨을 거 두는 것을 볼 수가 없어서 고개를 돌렸다. 바로 그때 누가 문을 두 드렸다. 이웃 마을에 사는 시오라비였다. 그가 말했다. “제수께 이 아이에 대해 걱정하지 말라고 알려드리러 왔어요. 얘는 곧 회복될 것이고 언젠가 하나님이 그 영혼을 구원하실 거예요.” 그녀는 당황하고 믿을 수 없었다. 그러자 그는 자기가 난로가에 앉아 시편 91편을 읽고 있는데 하나님이 마지막 세 구절을 통해 자기에게 이렇게 분명히 말씀해주셨다고 상황을 설명했다.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란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를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스코틀랜드 찬송시에서). 내가 그 아이였다. 하나님이 그날 밤 나를 죽음에서 건지셨다. 그리고 13년 후에 내 영혼을 구원하시고 장수로 나를 만족케 하셨다. 이제 여러분은 내가 이 91편을 ‘나의 시’라고 일컬은 이유를 알게 되었을 것이다. 나는 기꺼이 이 시를 다른 이들과 더불어 공유한다. 하지만 이 시는 분명히 ‘나의’ 시이다!  대부분 신학자들은 내 말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그들은 이 시가 메시야 시라고 주장한다. 물론 그 말이 맞다. 그 우선적인 ‘해석’ 은 우리의 놀라운 주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이 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관점에서 이 시를 상고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런 중에도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주시는 그 보배로운 약속들을 우리 것으로 삼을 수 있다. “주의 은혜의 강수를 마시며 모든 약속 위에 내 이름을 기록하네.”

91:1~2

예수님은 놀라운 방법으로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하시고 전능하신 자의 그늘 아래 거하신 분이시다. 그분처럼 산 자는 없었다. 그분은 아버지 하나님과 절대적이고 깨어지지 않는 사귐 가운데 사셨다. 그분은 완전한 하나님이면서 완전한 인간이셨다. 그분은 하나님을 철저하고도 완전히 의지하는 가운데 지상 생애를 보내셨다. 아무 주저함 없이 그분은 하늘을 우러러 “저는 나의 피난 처요 나의 요새요 나의 의뢰하는 하나님이라”고 고백할 수 있으셨다.

91:3
3~13절에는 그분의 온전한 믿음의 삶으로 인해 그분의 것이 된 놀라운 안전을 주 예수님께 확인시키는 성령의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무엇으로부터의 안전을 보장하는가? 그것은 다음 아홉 가지이다.
1)숨은 위험에서 건짐.
새 사냥꾼의 올무는 방심하는 영혼을 덮치려는 대적의 악한 음모를 가리킨다.
2)치명적인 질병을 면케 함.
우리 주님의 경우엔 그분이 병이 들었다고 믿을 만한 아무 이유가 없다.

91:4
3)전능자 안에서의 그늘과 피난처.
하나님의 부드럽고 개인적인 돌보심은 어미새가 새끼를 돌보는 것에 비유된다.
4)하나님의 신실하심 안에서의 보호.
그분의 약속은 확실하다. 그 분은 말씀하신 것을 행하신다. 그것이 신자의 방패와 손 방패이다.

91:5
5)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
흔히 두려움을 일으키는 네 가지 유형의 위험이 언급되어 있다. 대적의 밤을 틈탄 공격은 그 근원을 알 수 없는 까닭에 특히 두렵다. ‘낮에 흐르는 화살’은 문자 그대로의 화살로 이해할 수도 있고 ‘악인의 악한 음모와 비방’을 가리키는 비유로 이해할 수도 있다(확대역).

91:6
6)‘흑암 중에 행하는 염병’
역시 문자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고 비유적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육체적인 질병은 햇빛이 차단된 곳에서 번성하며, 도덕적인 악(惡) 역시 어두움 속에서 번성한다. ‘백주에 황폐케 하는 파멸’은 구체적으로 밝혀진 바 없다. 그 약속 이보다 광범하게 적용되도록 그냥 그 표현대로 두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91:7~8
 7)살육의 와중에서도 보호받음.
대대적인 살육이 벌어지는 중에도 여호와께서 사랑하시는 그분은 절대적으로 안전하다. 악인이 징벌 받을 때에 그분은 아무 해를 당할 염려 없이 곁에서 지켜 보실 것이다.

 91:9~10
8)재난에서 보호받음.
구주께서는 지존자를 피난처와 거처로 삼으셨기 때문에 아무 재난도 임하지 못하고 아무 재앙도 가까이 하지 못한다.

 91:11~12
9)천사의 호위를 받음.
본문은 사단이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고 주 예수님을 유혹할 때 인용한 구절이다(눅 4:10, 11). 예수님은 그분에게 적용된 그 구절은 부인하시지 않고, 다만 그 것이 하나님을 시험하는 구실로 사용될 수 있는 가능성을 부인하셨다. 하나님은 그분에게 성전에서 뛰어내리라고 말씀하신 적이 없으셨다. 만일 구주께서 뛰어내리셨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떠나 행동하신 것이며 따라서 그 보호의 약속은 아무 소용없었을 것이다.

91:13
사자와 독사에 대한 승리.
흥미롭게도 사단은 이 구절 앞에서 멈추었다. 만일 그가 이 구절을 인용했다면 그 자신의 운명을 묘사한 셈이었다! 사단은 성경에서 우는 사자와(벧전 5:8) 옛 뱀(계 12:9)으로 묘사되어 있다. 사자로서, 그는 물리적인 폭력을 사용하는 거세고 험악한 핍박자이다. 뱀으로서, 그는 속이고 파멸시키는 사악한 전략을 동원한다. 이와 같이 성령께서는 인자께서 지상에서 완전한 믿음과 순종의 삶을 보내시는 동안 아홉 가지 안전책을 제시해주셨다. 이 시점에서 하나님 아버지께서 “내가 하리라”는 여섯 번의 놀라운 약속으로 그 안전책들을 확증해주신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예수란 인물의 생애 전체가 암시되어 있는 듯하다.

91:14
그분의 흠 없는 지상 생애.
“저가 나를 사랑한즉 내가 저를 건지리라. 저가 내 이름을 안즉 내가 저를 높이리라.”

91:15
인간의 죄를 속하기 위한 그분의 고난.
“저가 내게 간구하리니 내가 응답하리라. 저희 환란 때에 내가 저와 함께 하여.”
그분의 부활과 승천. “저를 건지고 영화롭게 하리라.”

 91:16
하나님 우편에 계신 그분의 현재의 위치와 그분의 장차 올 나라.
“내가 장수함으로 저로 만족케 하며 나의 구원으로 보이리라.” 이 시는 얼마나 많은 것을 말해주는지! 그러나 기다리라! 아마 당 신은 이 시가 말해주지 않는 것, 이 시가 대답하지 않는 중요한 질문들을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메시야의 안전에 대한 이 모든 약속을, 마침내 사람들이 그분을 죽인 사실과 어떻게 조화시킬 것인가? 그리고 오늘날 신자들에게 이 시를 적용한다면, 어떻게 이 시를, 신자들이 질병에 걸리고 전쟁에서 죽고 비행기 사고로 죽는 사실과 조화시킬 것인가? 그 부분적인 답은, 적어도 이러하다. 즉,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는 그의 사역이 마쳐질 때까지는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께서 유대로 돌아가자고 제안하셨을 때 제자들과 함께 나눈 대화를 보라. “‘유대로 다시 가자’ 하시니 제자들이 말하되 ‘랍비여 방금도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 하였는데 또 그리로 가시려 하나이까’ 예수께 서 대답하시되 ‘낮이 열 두 시가 아니냐? 사람이 낮에 다니면 이 세상의 빛을 보므로 실족하지 아니하고 밤에 다니면 빛이 그 사람 안에 없는 고로 실족하느니라’.”(요 11:7~10). 주님은 자신이 자신의 일을 마치기 전에는 유대인들이 자신을 해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셨다. 그리고 이것은 모든 신자들에게 사실이다. 신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으로 보호하심을 입고 있다. 더 나아가, 주님은 이 시의 어느 구절을 통해 특별하고도 개인적인 방법으로 어느 신자에게 말씀할 수 있으시다. 만일 그분이 그렇게 하신다면 그 신자는 그 약속을 주장하고 의지할 수 있다. 서두에서 말한 내 개인의 사건이 그 사례이다. 그리고 끝으로, 주님을 의지하는 자는 그분의 보호를 확신할 수 있다는 것은 일반적인 의미에서 사실이다. 우리는 예외적인 경우를 너무 강조하는 경향이 있다. 주님 안에 안전함이 있다는, 그 일반적인 원칙은 여전히 유효하다.

92편 : 영적인 식물학에서 얻는 교훈

92:1~5
여호와께 감사하는 것이 좋다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그러한 감사를 받기에 합당하시다는 사실로도 ‘좋은 것’이며, 감사를 표하는 자와 그 소리를 듣는 자 들에게도 ‘좋은 것’이다. 지존자의 이름을 찬양하는 것은 누구나 참여할 수 있는 적절한 활동이다. 그리고 찬양할 제목이 결코 부족하지 않다. 그분의 인자하심은 아침에 찬양할 영원한 주제이며, 그분의 신실하심은 밤중에 찬양할 충분한 주제이다. 십현금과 비파와 수금의 정숙한 소리로 찬양의 아름다움을 더하라. 어떤 아름다운 음악으로도 그분의 창조와 섭리와 구속의 놀라운 사역으로 인해 여호와를 찬양하기에 충분치 않다.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을 생각만해도 마음이 즐거이 노래 부르게 된다. 하나님의 놀랍고 묘한 계획, 곧 그분의 깊은 생각과 지혜로운 계획들은 찬양의 불길을 더욱 북돋는다.

92:6~9
그러나 자연인에게 하나님의 깊은 것을 깨달을 것을 기대하지 말라. 그들은 그것을 이해할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런 일은 영적으로라야 분별하기 때문이다(고후 2:14). 자연인은 세상사에 대해 아무리 지혜가 뛰어나다 하더라도, 영적인 실재들에 관한한 무감각하고 우매하다. 그는 우주의 정해진 도덕법이 악인의 멸망을 규정짓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잠시 형통한 듯 보이지만 그의 형통은 풀과 같이 쉬 사라진다. 여호와께서 확실히, 영원히 보좌에 앉아 계시듯이, 그분의 대적도 확실히 흩어지고 패망할 것이다.

92:10~11
반면에, 하나님은 의인의 뿔은 들소 뿔처럼 높이신다. 다시 말해서 그분의 백성에게는 힘과 존귀를 주신다. 그리고 신실한 자들에게는, 성령의 은혜로운 사역을 상징하는 신선한 기름을 부어주신다. 마지막 장이 기록될 때 하나님의 성도들은 그들의 대적의 죽음을 목도할 것이며, 그들의 운명을 슬퍼하는 길고, 낮은 애곡 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92:12~15
의인의 번성은 감람나무와 레바논의 백향목의 번성에 비교할 수 있다. 감람나무는 아름다움과 결실을 상징하며, 백향목은 힘과 영구성을 상징한다. 신자들이 번성하는 이유는 그들이 여호와의 전에 심기우고 우리 하나님의 궁정에서 흥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여호와와 날마다 사귐을 나누며 그분에게서 힘과 양분을 공급받는다. 세월이 열매 맺는 능력을 부여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은 계속해서 왕성한 영적인 생명(수액)으로 활력이 넘치며, 그들의 증거는 늘 푸르다. 그들의 번성은 여호와께서 그분의 약속을 이루는데 정직하시다는 증거이다. 그분은 믿을 만한 반석이시며, 그분에게는 신뢰하지 못할 것이 전혀 없다. 악인은 풀에 비유되고(7절), 의인은 늘 푸른 나무에 비유된다(14절). 악인은 시들고 쇠하지만 의인은 더욱 강건해진다. 이것이 영적인 식물학의 질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