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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시편 101-102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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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6월 10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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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01-102편 연구

101편 : 왕의 결심

 다윗이 그의 사적인 삶과 공적인 삶에 있어서 바라는 기대치는 그가 이룬 성취를 뛰어넘었다. 그러나 그가 그의 집과 왕국에 대해 정한 목표는 주 예수께서 오셔서 다윗의 위에 앉으실 때 그분에 의해 완전히 실현될 것이다. 이 시는 다윗이 통치를 시작하면서 선언 한 성명으로서, 그가 품은 큰 뜻을 잘 표현해준다.   

101:1  

그는 먼저 인자와 공의를 찬송했는데, 이 둘은 여호와에게서 발견되며, 다윗이 그 자신에게서 재생산되기를 원하는 것들이다. 아마 그는 우선적으로 하나님 자신의 속성, 즉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인자와 그분의 대적에 대한 그분의 공의로운 심판을 생각하고 있는 듯하다. 왜냐하면 “여호와여 내가 주께 찬송하리이다”라고 즉시 덧붙이고 있기 때문이다.

101:2

이어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삶에 바라는 몇몇 특질들을 언급한다. 그는 완전한(책망할 것 없는) 길, 즉 여호와의 가르침에 아주 근접하여 비난받을 만한 아무 정당한 근거가 없는 삶을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그의 바램은 극히 열렬하고 진지하여 “주께서 언제나 내게 임하시겠나이까?”라는 탄식을 발하고 있다. 이 탄식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그는 하나님이 임하사 그가 올바른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보시기를 원했다. 그는 하나님이 그와 더불어 맺으신 언약의 성취(삼하 7장), 즉 하나님의 지상왕국이 마침내 세워지기를 열망했다. 그는 ‘그의 결단이 실행되려면 하나님이 친히 함께 하셔야 한다고 느꼈다’.” 그는 그의 집 안에서 정직한 마음으로 행하겠다고 결단했다. 가정생활에서 그는 의롭고 정직하게 행동할 것이다. 일구 이언하거나 두 얼굴을 갖지 않을 것이다!

101:3~4

그의 눈앞에 악한 것을 일절 두지 않겠다는 것은 일체의 비루한 사람이나 계획이나 활동을 묵인하지 않겠다는 의미이다. 배도자의 행위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을 미워하고 또 그 행위에 오염되지 않도록 자신을 지키겠다고 그는 결심했다. 진리와 의에서 떠난 자들은 그와 일절 사귀지 못할 것이다. 그가 멀리하기를 원하는 또 다른 성향은 사특한 마음, 즉 거짓과 부패를 일삼는 마음이다. 그는 그 자신이 그러한 악에 빠지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류의 사람을 조언자로 두지도 않을 것이다. “악한 일을 내가 알지 아니하리로다”라는 합당한 결단은 그 자신의 삶을 가리켜 말한 것일 수도 있고 그의 궁전 사람들을 가리켜 말한 것일 수도 있다. 흠정역(KJV)은 “내가 악한 사람을 알지 아니하리로다” 라고 옮기고 있다. 여기서 “안다”는 말은 호의적으로 받아들이거나 격려하는 것을 의미한다.

101:5

그 이웃을 비방하는 자는 멸망할 것이다. 이것은 개정 표준역(RSV)처럼 죽임 당한다는 의미라기보다그는 왕의 통치 부서에 위임되지 못하거나 침묵하게 된다는 의미일 것이다(NASB 난하 주). 허세를 부리는 교만한 자도 같은 처지가 될 것이다. 그런 자는 왕궁에서 직위를 얻지 못할 것이다.

101:6

왕궁에서 일할 수 있는 중요한 자질은 도덕적 영적 정직성이다. ‘땅의 충성된 자’가 왕의 조력자가 될 것이며, 삶이 깨끗한 자가 왕의 종이 될 것이다.

101:7~8

사기꾼과 거짓말쟁이는 왕궁에 거하지 못할 것이다. 왕은 허풍과 거짓말을 일삼는 자들과 사귀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왕은 모든 형태의 악을 신속히, 엄격히 제거하겠다고 결심했다. 다시 한번, ‘멸하다’는 말은 여호와의 성 예루살렘에서 그러한 악을 징벌 내지 쫓아내겠다는 뜻일 수 있다. “반드시 모든 종류의 악을 이 땅에서 뿌리뽑고 모든 행악자를 여호와의 성에서 멸할 것이다.”

102편 : 갈보리에 나타나신 삼위 하나님

이 시를 이해하는 열쇠는 화자(話者)가 바뀌는 것을 파악하는데 있다. 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린 채 하나님께 아뢴다(1~11절). 아버지께서 사랑하는 아들에게 대답하신다. 이 사실은 12절을 히브리서 1:8과 비교함으로 알 수 있다(12~15절). 화자가 밝혀져 있지 않으나, 성령께서 메시야의 지배 아래 이뤄 지는 이스라엘의 참된 회복을 묘사하고 계신다고 이해할 수 있다 (16~22절). 구주께서 우리 죄를 위해 하나님의 손에 의해 고난 당하시며 하시는 말씀을 다시 한 번 들을 수 있다(23,24절). 히브리서 1:10~12과 본문을 비교해보면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말씀하고 계심을 알 수 있다(24~28절).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바, 여기에서 우리는 주 예수께서 세상 죄를 구속하는 일을 하실 때 삼위 하나님 사이에 일어난 대화를 들을 수 있다.

102:1~2

1,2절에서 고난 당하는 자의 기도를 대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자기를 낮추사 죽기까지, 곧 십자가에 죽기까지 자기를 낮추신 그 놀라운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돕는 자요 치료자요 친구 되신 예수님, 왜 그분이 갈보리에 계셨는지, 왜 거기에 계셨는지 말해주오.” 우리는 그분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시고, 고난 중에 처한 자신에게 가까이 하시고 속히 응답해주시기를 여호와께 탄원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102:3~7

이어서 그분은 자신이 슬픔의 사람(the Man of Sorrows)으로서 견디도록 부름 받은 그 고난을 묘사하신다. 그분은 생명이 다 가고 있음을 의식했다. 그분의 날이 연기처럼 사라지고 있었다. 그분의 몸은 뜨거운 열로 타고 있었다. 그 몸의 기관들이 시들고 메말라버려 식욕이 사라졌다. 그 고난이 오래되어 이제 뼈와 가죽만 남게 되었다. 광야의 새와 황폐한 곳의 부엉이 같이 그분은 그야말로 버림받음과 우울함의 자화상이었다. 물론 잠도 잘 수 없었다. 하나님과 사람에게 버림받은 채 그분은 지붕의 참새처럼 외로웠다.

102:8~11

그분의 대적들은 비방하기를 그치지 않았다. 그들은 그분의 이름을 저주거리로 삼았다. (오늘날도 예수의 히브리어 이름인 ‘예수아’(Yeshua)는 그 대적에 의해 “그 이름이 땅에서 끊어질지라”는 뜻의 저주하는 말인 ‘예수’(Yeshu)로 축약되어 사용된다.) 슬픔의 재가 그분의 양식이었고, 그분의 음료는 슬픔의 눈물로 흐려졌다. 그 모든 상황 속에서 그분은 자신이 하나님의 분과 노로 인해 고난 당하고 있음을 인식하셨다. 하나님이 개인적으로 그분에게 분노하신 것이 아니라, 그 하나님의 어린양이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담당하고 계신 우리의 죄에 대해 분노하신 것이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채 그분은 자신이 집어들려 멀리 던져진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 분의 날은 저녁 그림자처럼 기울어갔고 그분의 생명은 풀같이 시들어갔다.

102:11~15

이제 하나님이 확신과 격려의 말로 주 예수님께 답하신다. 아들을 주(主)로 칭하면서 하나님은 그분이 영원히 거할 것과 그 이름이 대대에 이를 것이라고 상기시키셨다. 물론 그분은 죽을 것이지만 부활하여 승천하실 것이다. 그리고 유다 지파의 사자로 이 땅에 재림하여 시온에 긍휼을 베푸실 것이다. 지금은 옆으로 제쳐진 이스라엘 민족이 그 때에는 다시금 은총 받는 위치로 돌아올 것이다. 그러한 회복을 기다리는 동안 이스라엘 백성은 시온의 돌들을 즐거워하고 그 티끌도 긍휼히 여길 것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그들이 전에 통곡의 벽이라 부른 서쪽 벽에 깊은 관심을 표하고 또 옛 예루살렘 도성을 무척 그리워하고 있는데서 엿볼 수 있다. 시온이 그 왕을 반가이 맞을 때 이방 열국은 여호와의 이름을 경외할 것이며 모든 지상 통치자들은 그분께 경의를 표할 것이다.

102:16~22

본문에서는 1인칭과 2인칭 대명사들이 생략되고 3 인칭 대명사만 나온다. 따라서, 앞서 암시했듯이, 본문은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이뤄지는 이스라엘의 장래 회복을 묘사하는 성령님의 음성일 수도 있다. 메시야가 능력과 큰 영광으로 재림하여 시온을 다시 세울 것이다. 그 날에 그분의 흩어진 백성들의 기도가 응답될 것이다. 그 때에 그들이 간구가 헛되지 않았음을 알게 될 것이다. 장래 세대들은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굽어 살피사 그분의 핍박받고 흩어진 백성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을 이스라엘 땅으로 다시 인도해들이신 놀라운 이야기를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열국이 여호와께 경배하러 예루살렘에 모일 때 그들은 그분이 갇힌 자와 정죄 당한 자를 해방하신 일을 다시 진술하고 이스라엘에 대한 그분의 은혜로운 섭리로 인해 여호와를 찬양할 것이다.

102:23~28

이제 다시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는 주님께로 장면이 바뀐다. 그분은 그 때에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이셨다. 그러나 이미 그 힘이 중도에 쇠약해졌다. 그 생명이 일찍 마감되려 했다. 이에 그분은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중년에 나를 데려가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하셨다. 그 응답이 즉시 하늘로부터 왔다(24절). “주여, 주는 영원히 사시나이다”(TEV). 우리가 알기에 여기서 말씀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신 데, 왜냐하면 히브리서 1:10~12절에 의하면 이어지는 말씀이 하나님 아버지가 하시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그 아들에 관해 증거하시는 말씀을 주목해 보라. “그분은 창조사역의 능동적인 대리자이셨다. ‘주께서 옛적에 땅의 기초를 두셨사오며.’ 만물은 없어질 것이나 그분은 영존하실 것이다. 만물은 다 옷같이 낡고 더 좋은 것으로 바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불변하고 영원하시다. 그리고 그분의 영원성만 안전할 뿐 아니라 그분의 백성과 그 후손의 백성의 영원성도 안전할 것이다. 그분의 종들의 자손이 안전히 거할 것이며, 그들의 후손도 그분의 보호 아래 거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