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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시편 115-116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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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6월 21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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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15-116편 연구

 115편: 이스라엘이 우상을 거절하다
 
이제 유다인들이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왔다. 그들의 고토로 돌아온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에게 어떤 공로가 있어서가 아니었다. 그들의 회복은 전적으로 여호와 때문이다. 그분이 자기 백성에 대한 변치 않는 사랑으로 인해, 그리고 자신의 약속에 충실한 그 신실하심으로 인해 그들을 회복시키신 것이다.

115:1~2

너무도 오랫동안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백성을 조롱해 왔다.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이렇게 70년간이나 포로로 놔두는 것을 보니 너희에게 아무 관심이 없는가 보구나!” 그러나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그런 말을 할 수 없다. 그들의 조롱과 야유는 잠잠해졌다. 하나님이 자신의 이름을 옹호하신 것이다.

115:3

이제 참 하나님이 초월자시며(“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주권자이심(“원하시는 모든 것을 행하셨나이다”)을 온 세상에 분명히 알려야 한다. 하나님의 초월자 되심(초월성)은 그분이 우주 위에 높으시며 우주를 떠나 계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주권 자되심(주권성)은 그분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자유롭게 행하신다는 것과 그분이 원하시는 것은 항상 선하고 의롭고 지혜롭다는 것을 의미한다.

115:4~7

하나님이 유다 백성들로 바벨론의 포로가 되게 하신 것은 우상숭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우상의 무력함과 무가치함을 깨달은 까닭에 그들은 그 새긴 신상으로 인해 이방인들을 조롱한다. 우상은 은금으로 만들어지며, 따라서 그 가치는 시장의 형편에 따라 결정된다. 그것은 사람에 의해 제작되며, 따라서 그것을 숭배하는 자보다 열등한 존재이다. 그것은 입이 있어도 가르치거나 장래를 예언하지 못한다. 그것은 눈이 있어도 숭배자들의 문제를 살피지 못한다. 그것은 귀가 있어도 기도를 들을 능력이 없다. 그것은 코가 있어도 드려지는 제물의 향내를 맡지 못한다. 그것은 손이 있어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발이 있어도 그 선곳을 떠나지 못한다. 그것은 목구멍으로 소리도 내지 못한다.

115:8

우상을 만드는 자들은 우상과 같다. 사람들이 그 숭배하는 대상과 같아진다는 것은 영적인 영역에서의 정해진 원리이다. 그들의 도덕 수준은 그들의 신(神)에 의해 형성된다. 우상을 신뢰하는 자는 불순하고 나약하고 우둔하고 지각이 없게 된다.

115:5

오직 여호와만이 신뢰할 가치가 있다. 그래서 이제 독창자 (시편 기자)가 앞으로 나아가 여호와를 확고히 신뢰하는 삶을 살라고 이스라엘에게 촉구한다. 이에 합창대가 “그는 너희 도움이시요 너희 방패시로다”라는 고백으로 화답한다.

115:10~11

이어서 제사장 가문인 아론의 집이 여호와를 전폭적으로 신뢰하라는 권면을 듣는다. 그리고 합창대가, 그분은 그들의 검증받고 증명된 도움이요 방패시라는 고백으로 다시금 화답한다. 세 번째로, 아마도 이방인 회심자를 포함하여 여호와를 경외하는 모든 자에게로 대상을 넓혀 선창자가 호소한다. 그들 역시 그분이 그들의 참 도움이요 방패임을 알고 있다.

115:12~15

마치 제사장들이 노래를 이어서, 이스라엘을 생각하사 그 부(富)를 회복시키신 그 동일한 여호와께서 그들, 곧 백성들과 제사장들과 이방인 회심자들과 연령과 신분을 막론하고 모든 부류의 사람들에게 복 주실 것이라고 백성들에게 확증하는 듯하다. 그들은 하나님이 그분의 백성과 그들의 후손을 번창케 해주시기를 기도한다. 아마도 그들은 그 수가 고갈된 민족의 수적인 증가를 염두에 둔 듯하다. 그러나 그 기도는 영적, 물질적 번성 또한 포함할 수도 있다. 게다가 그들은 여호와, 곧 천지를 지으신 분의 일반적인 축복을 기원한다.

115:16

하나님은 하늘은 그 자신의 거처로 지으셨지만 땅은 사람이 거할 곳으로 허락하셨다. 그리고 그곳에서 사람은 그분을 경배하고 섬길 수 있다.

115:17~18

17절은 죽음은 인간의 여호와를 찬양할 능력을 종식시킨다는 구약 성도들의 일반적인 견해를 반영한다. 그들이 아는 한 죽은 자는 철저한 침묵 상태에 있다. 이제 우리는, 믿음 안에서 죽는 자들은 즉시 주님의 임재 가운데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 몸은 비록 무덤 속에 침묵 중에 누워있지만, 그 영혼은 아무 속박 없이 여호와를 경배하고 찬양한다. 그러나 그들의 고백의 절정은 우리에게도 유효하다. 즉, 우리는 살아있는 동안 여호와를 송축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이 이 시를 마감 짓는 서원이다. “우리는 이제부터 영원까지 여호와를 송축하리로다. 할렐루야!”


116편: 내가 여호와를 사랑하는도다!

이 시 전체에는 첫 번째 부활절 아침의 환희가 울려 퍼지고 있다. 동산의 무덤이 비었다.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 그리고 이제 그분이 그 부활과 관련하여 응답된 기도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의 찬미를 올리고 있다.

116:1~4

그분이 어떻게 시작하는지를 보라. “내가 저를 사랑하는도다.” 세 단어 뿐이지만 가장 순수한 예배가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은 장려한 고백으로만 가까이할 수 있다는 잘못 생각하는 나약한 영혼에게, 여호와께 대한 아주 단순한 사랑의 고백이 참된 예배임을 안다는 것은 크나큰 격려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거기서 멈추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구주와 같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위대한 일을 진술하기 위해 나아가야 한다. 그것 또한 예배이다. 주 예수님은 아버지께서 겟세마네와 골고다에서 드려진 번민 속의 간구를 들으신 까닭에 그치지 않는 감사로 마음이 흘러 넘쳤다. 사망의 줄이 그분을 조여오고 육체가 해체되는 고통이 그분을 사로잡을 때, 그분이 형언할 수 없는 괴로움을 견디고 있을 때, 그 때 그분은 여호와께 구원해달라고 부르짖으셨다. 그리고 여호와께서 그분을 구원하셨다. 그분을 죽어가는데서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죽음 가운데서 구원하신 것이다.

116:5~6

예배의 세 번째 요소는 여호와의 영광을 진술하는데서 발견된다.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여기서, 자신의 부활 가운데 드러난 하나님의 아름다운 덕을 열거하신다.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즉, 인자하고 선하시다. 하나님은 의로우시다. 그분이 하시는 모든 것이 공의롭고 공정하다. 하나님은 자비하시다. 그분은 동정이 많으시다. 여호와는 어리석은 자를 보존하신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 예수님의 경우로 말하자면, 여호와는 신실한 자, 무죄한 자, 혹은 아무 도울 이 없는 자를 보존하신다는 의미이다. 하나님은 그분의 백성이 위경에 처할 때 그들을 구원하신다.

116:7

끝으로, 하나님은 자기를 의뢰하는 자들을 후대하신다. 그 분은 축복을 베푸는데 인색하지 않으시다. 그러기에 주 예수님은 “내 영혼아, 네 평안함에 돌아갈지어다”라고 말씀하신다. 그분의 괴로움과 번민과 고통이 끝났다. 하나님이 그분의 기도를 들으사 그분을 구원하셨다. 이제 그분은 잘 예비된 안식에 들어가신다.

116:8~10

이어서 우리 주님은 아버지께서 그분을 위해 행하신 일을 다시 상기하신다. 우리는 여기서, 같은 예배를 반복하기를 마다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은 자녀들의 찬양을 들으시는데 결코 지치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 찬양제목은 영원히 반복될 가치가 있다. 그리스도의 마음은 세 가지 구원을 베푸신 아버지께 대한 감사로 충만했다. 그 영혼이 죽음에서 건짐 받았다. 그 눈이 눈물에서 건짐 받았다. 그리고 그 발이 넘어짐에서 혹은 패배에서 건짐 받았다. 이제 그분은 산자의 땅에서 여호와 앞에 행하셨다. 죄와 사망과 무덤과 음부를 물리친 승리자로서 그렇게 행하셨다. 10,11절은 문맥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 다소 의문스럽다. 아마도 TEV가 그 의미를 잘 포착한 듯 보인다. “‘나는 완전히 망하였다’라고 말할 때나, 혹은 심지어 ‘아무도 믿을 수 없다’라고 두려움 중에 말할 때에도 나는 여전히 믿음을 간직했다.” 가장 깊은 고난의 순간에도, 혹은 사람들이 믿을 가치가 없음이 드러났을 때에도 그분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분의 고백은 불신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깊은 확신에서 나온 것이다.

116:12~13

이어서 “여호와께서 내게 주신 모든 은혜를 무엇으로 보답할꼬?”라는 질문으로 표현된 예배의 마지막 요소가 있다. 우리의 경우에는, 그분께 보답한다는 개념이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지불하는 어떤 대가도 그분의 은혜를 욕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적절한 방법으로 그분의 은혜에 반응하고자 하는 타고난 본능이 있다. 그 방법이 구원의 잔을 들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다. 구원의 잔을 든다는 것은 여호와께 우리를 구원해 주신 데 대해 감사를 표하는 것을 의미한다. 여호와의 이름을 부른다는 것은 그분의 구원의 위대함을 깨닫고 특별한 헌신의 행위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116:14

부활하신 구주는 여호와의 모든 백성 앞에서 자신의 서원을 여호와께 갚기로 결심하셨다. 그것은 고난당하기 전과 고난 당하는 동안 약속하신 찬양과 경배와 감사의 서원이었다. 이제 그분은 그러한 서원을 이행하신다.

116:15

다시 한 번 “성도의 죽는 것을 여호와께서 귀중히 보시는 도다”라는 고백에 의해 문맥의 흐름이 갑자기 중단되는 듯하다. 이 구절은 비록 문맥에 맞추기에는 어려움을 느끼지만 한 독립된 말씀으로 애독될 수 있다. 그것은 모든 성도들에게 사실이다. 그들의 죽 음은 영광 중에 계신 주님과 함께 거하는 것이기에 우리 하나님께 귀중하다. 그러나 그것은 주 예수님의 경우에는 더욱더 사실이었다. 그분의 죽음은 경건치 않은 죄인들을 의롭다 할 수 있는 의로운 근거를 제공하는 까닭에 아버지께 귀중했다.

116:16~17

16절에서, 부활하신 예수께서 여전히 “여호와의 종” 이시다. 이것은 마치 그분이 “내가 상전을 사랑하니 나가서 자유하지 않겠노라”라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다(출 21:5). 그처럼 그분은 영원한 종이 되겠다고 스스로 서명하셨다. 하나님의 여종의 아들로서 그분은 그 모친 마리아가 그랬듯이 여호와께서 그분의 속박을 풀어 주신 까닭에 하나님을 섬기겠다고 서원하셨다.

116:18~19

다시 한번 그분은 아버지께 감사의 제사를 드리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겠다고 서원하셨다. 예루살렘 성전에 모인 하나님의 백성의 회중에서 장차 주 예수님은 여호와께 찬양의 합창을 올리도록 그들을 인도함으로써 자신의 서원을 갚으실 것이다. 그 일은 임마누엘이신 그분께서 그 못 자국 난 손으로 우주의 왕의 홀을 쥐기 위해 지상에 재림하실 때 이뤄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