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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시편 121-122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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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6월 24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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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1-122편 연구

 121편: 지키시리라!
 
121:1~2
흠정역에는 이 시가 이렇게 시작된다. “내가 나의 도움이 오는 산(hills)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오도다.” 이후의 번역자들은 여기에 이교적인 요소, 즉 도움이 여호와에게서가 아닌 산에서 온다는 개념이 들어있다고 생각했다(렘 3:23). 그래서 그들은 1절의 둘째 소절을 질문형으로 바꾸었다. 이를테면 NKJV는 이렇게 옮기고 있다. “내가 산(hills)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꼬? 나의 도움이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 오도다.” 나는 여기서 여전히 흠정역의 번역을 선호하는데 그 이유를 밝히겠다. 예루살렘 성전은 지상의 하나님의 거처였다. 지성소의 영광의 구름은 그분의 백성 가운데 계신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했다. 예루살렘 성은 산 위에 위치해 있으며 산들로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이스라엘의 다른 지역에 있는 유대인이 하나님의 도움을 필요로 할 때는 산지(hills)를 바라보았다. 그에게는 그것이 여호와를 바라보는 것과 동일했다. 창조주의 거처가 예루살렘 산지에 있었으므로 모든 도움이 산에서 온다는 시적인 표현이 가능했던 것이다. 처음 두 구절에서 화자(話者)는 시편 기자로서 천지를 지으신 분에 대한 온전한 신뢰를 표현하고 있다.

121:3
3절에서부터 화자가 바뀐다. 나머지 구절에서 우리는 성령께서 여호와를 의뢰하는 자들의 영원한 안전을 보장하고 계신 것을 들을 수 있다. 요지부동한 안정을 보장하고 있다. 신자의 발은 실족하는 데서 보존될 것이다. 발은 기초나 혹은 서 있는 것을 의미하므로, 그것은 하나님이 자신을 신뢰하는 자녀를 미끄러지거나 넘어지지 않도록 보호하신다는 의미이다.

121:4
또한 졸지도 주무시지도 않는 보호자를 보장하고 있다. 알렉산더 대제는 그의 군사들에게 “제군들이 잘 수 있도록 내가 깨어 있다”고 말했다. 더 이상 우리 주변 세계를 의식하지 않는 밤 시간에 끊임없는, 지칠 줄 모르는 돌봄으로 우리를 지키시는 알렉산더 보다 더 위대한 분이 계신다.

121:5~6
우리의 보호자가 다름 아닌 여호와 자신이라는 보장이 여기에 있다. 위대한 우주의 주재께서 지극히 보잘것없는 성도의 안전을 친히 책임지고 계신다. 그분이 모든 악한 세력에서 보호하신다는 보장이 있다. 그분이 “네 우편에서 네 그늘이 되신다”는 말은 그분이 밤낮 그분의 자녀를 해를 당하지 않게 지키는 호위병으로 곁에 계신다는 의미이다. “낮의 해가 너를 상치 아니하며”는 현대 문자주의자들에 의해 일반적으로 일사병(日射病)으로 해석된다. “달”의 비유는 종종 고대의 미신과 민간전승에 빗대어 표현한 것이라고 그럴듯하게 풀이된다. 그러나 귀신에게서 해방된 자들과 영의 세계에서의 해와 달의 중요한 역할을 알고 있는 자들에게는 기쁘게도 본문이 귀신의 사슬로부터의 보호와 자유를 약속해준다.

121:7~8
모든 환란에서 건져주신다는 보장이 있다.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신자의 삶에 어떤 일도 일어날 수 없다는 것은 확실한 사실이다. 우연한 일이나 아무 목적 없는 사건이나 운명적인 비극 따위는 일절 없다. 그분은 비록 질병과 고난과 죽음을 만들어낸 장본인은 아니지만 그것들을 주장하고 사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 가신다. 그 사이에 그분을 신뢰하는 자녀는 하나님이 자신을 사랑하는 자, 곧 자신의 뜻대로 부름을 받은 자들에게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롬 8:28). 끝으로, 시간과 영원에서 하나님이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세세히 살피신다는 보장이 있다. 그분은 우리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실 것이다. “지키다”와 “지키는 자”라는 단어가 이 여덟 구절의 지면에서 세 번 나온다. “보존하다”는 단어는 세 번 나온다. 그 표현들이 결합하여, 여호와를 유일한 소망으로 모시고 사는 사람만큼 안전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선언하고 있다. “예수님을 의지하고 안식을 누리는 영혼은 그분이 결코, 결코 대적에게 내어주지 않네. 지옥의 모든 권세가 그 영혼을 멸하려 해도 그분이 결코, 결코 버리지 않으시네!” (리차드 킨; 1787).

122편: 평화의 성

“오, 주의 보좌 앞에서 보내는 그 한 시간의 순결한 기쁨이여, 무릎 꿇고 기도할 때, 주와 함께 있을 때 나는 친구와 이야기하듯 이야기를 나누네!” (화니, J. 크로스비).

122:1
하나님을 경외하는 유대인들에 의해, 예루살렘 절기에 올라가 봐야할 시간이라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윗은 위에서 말한 그러한 순결한 기쁨에 사로잡혔다. 그는 기뻐했다. 무거운 의무감이나 지루한 일상사라는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예배드리러 성전에 올라가는데서 그는 만족과 기쁨을 발견했다.

122:2
그리고 이제 믿음의 순례자들이 실제로 성 안에 서 있었다. “예루살렘아, 우리 발이 네 성문 안에 섰도다!” 거룩한 귀향 본능에 이끌린 듯 그들은 하나님이 택하신 곳에 돌아왔다. 그곳에 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었다!

122:3~4
그들은 멀찍이서 조밀하게 지어진 황토빛깔 나는 도성을 동경의 눈길로 바라보았다. 사방 1마일 둘레인, 그 햇살이 내리쬐는 성벽 안에는 천장은 둥그렇고 지붕은 평평한 집들과 비좁은 골목 들이 있었다. 그러나 백성들이 매혹의 눈길로 응시한 한 건물은 여호와의 전이었다. 실질적인 의미에서 그들이 그 도성을 사모한 것은 바로 그 전 때문이었다. 그곳을 향해 여호와의 지파들이 순례 길을 떠났다. 그곳은 하나님이 자신의 백성에게 모여서 자신의 이름에 감사드리라고 선언하신 곳이었다.

122:5
물론 예루살렘은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수도이기도 했다. 그곳은 다윗의 집의 보좌를 둔 곳이었으며, 따라서 공의를 집행하기 위해 지정된 곳이었다.

122:6
그 이름은 ‘평강의 성’을 의미하지만, 이제까지 그 이름이 잘못 불려져왔다. 그 성에서 일어난 것과 같은 분쟁과 고난과 학살을 겪은 도시는 거의 없을 것이다. “예루살렘의 돌들은 그 거룩함이 더럽혀진 흔적을 지니며, 그 성 벽은 종교의 이름으로 그 안에서 저질러진 범죄에 대한 기억을 지닌다. 다윗, 바로, 산헤립, 느부갓네살, 프톨레미, 헤롯, 디도, 십자군(고 드프리), 티무르군, 사라센군(살라딘) 등 모두가 그곳에서 전쟁과 살육을 벌였다.”) “예루살렘을 위하여 평안을 구하라!”는 통렬한 외침 속에는 역사적으로나 예언적으로나 엄청난 의미가 담겨있다. 어두운 시대가 앞에 놓여있다. 평강의 왕,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그곳을 다스리기 위해 다시 오실 때까지 그 성의 좁은 거리는 이방 침략자들의 발자국 소리로 울릴 것이다(눅 21:24). F. B. 메이어는 여기 6절에는 은혜스런 두운(頭韻)법이 나타나 있다고 지적했다. “평강의 성의 평안을 구하라. 예루살렘을 사랑하는 자는 평안할지라.” (Peace in the City of Peace May those be at peace who love her) 이 평안의 축도는 큰 임금의 성을 사랑하는 모든 자에게 드리워져 있다.

122:7~9
그러한 사랑이 그 성안의 평강과 그 궁중의 형통을 구하는 기도에 표현되어 있다. 경건한 유대인이 예루살렘을 위해 소원하던 것을 우리는 교회를 위해 소원해야 한다. 우리는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되게 하신 것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엡 4:3)! 교회의 평안과 번성을 통해 세상으로 복이 흘러 넘치게 된다. 그것이 8절이 의미하는 바다. 친척과 친구들을 위해서, 우리는 교회의 내적인 상처가 치유되고 그 다툼과 분열이 종식되기를 갈망해야 한다. 바네스는 이렇게 설명한다. “이것은 온 세상에 흩어진 경건한 자들의 마음의 소원을 표현해 준다. 이것이 하나님의 벗들이 교회를 심히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이다. 그들은 그들 곁에 있는 자들이 교회를 통해 구원을 발견하게 되기를 소망하고 갈망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이 성의 최고의 영광은 여호와의 전이 그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 성의 위치나 그 보기 흉한 건물이나 그 슬픈 역사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심되는 사실은 하나님이 그 성을 성전 부지 로 택하셨다는 것이다. 여호와의 임재가 그분이 은혜로 만지시는 모든 것 주위에 영광의 광채를 비추인다. 여러 세기 후에 예수님은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에게 이 진리를 상기시키셔야만 했다. 그들은 성전 자체보다 성전의 금을, 제단 자체 보다 제단의 예물을 더 중시했다. 예수님은 성전이 금을 거룩하게 하고 제단이 예물을 거룩하게 한다는 사실을 일깨워주셨다(마 23:16 ~22). 그리고 예루살렘을 세상의 다른 모든 도시와 구별짓게 하는 것은 주님 자신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