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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시편 129-130 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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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6월 30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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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29-130 편 연구

 129편: 반유대주의가 거두게 될 결과
 
이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는 이스라엘이 과거에 여러 대적에게 당한 일을 회고한 다음 여호와께 그 잔인한 침략자들을 멸절해줄 것을 간구한다.

129:1~2
이스라엘은 초기부터 극심한 고난을 당했다. 예를 들어 그들이 애굽에서 당한 압제는 그 초기에 있었던 잊을 수 없는 속박과 고난의 경험이었다. 그러나 대적은 유대인을 멸하는데 성공하지 못했다. 하나님의 백성은 항상 포로에서 해방되었다. 그들이 보존된 것은 역사상 괄목할 기적 중 하나였다.

129:3
그들의 고난은 깊고도 오래 지속되었다. 이방 압제자들이 농부가 밭을 갈 듯이 그들을 탄압했다. 그들의 등은 채찍에 맞아 긴 고랑이 패였다.

129:4
그러나 의로우신 여호와께서 적시에 개입하사 잔인한 침략 자들이 그분의 백성을 묶은 쇠사슬을 끊어버리셨다.

129:5~7
반유대주의자들은 항상 수치와 패배를 당할 것이다. 그 들은 결코 축복된 추수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근동 지역의 평평한 지붕에 돋아나는 성성한 잡초같이 될 것이다. 그들은 흙이 깊지 못하므로 깊이 뿌리내리지 못하며, 곧 뜨거운 햇볕에 말라 죽을 것이다. 사실 눈에 띨 만큼 자라기도 전에 시들 것이다. 그것을 베는 자가 품에 안기는커녕 손으로 한 줌 되게 잡기에도 부족할 것이다.

129:8
지붕 위의 풀은, 구경꾼들이 베는 자에게 “여호와의 복이 너희에게 있을지어다”라고 외치거나, 베는 자들이 이에 “우리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너희에게 축복한다”고 화답하는 즐거운 추수 장면을 연출해낼 수 없다(룻 2:4). 이처럼, 이스라엘의 대적들은 오랜 세기 동안 잔인한 경작을 벌여왔음에도 불구하고 즐거운 추수를 거부 당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그 심은 결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130편: 깊은데서 부르짖었나이다

최선의 기도는 강렬한 내적인 필요에서 나온다고 혹자는 말한 바 있다. 안락하고 형통한 때에는 진지한 기도를 거의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폭풍을 만나 괴로움 당할 때, 그 때 우리는 열렬하고 지속적인 간구로 은혜의 보좌를 만진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다.

130:1~2
나는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슬픔과 고난의 한계에 종종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시편 기자는 그러한 삶의 어두운 순간에 처해있다. 위를 올려다보는 길 밖에는 아무 소망이 없었다. 그래서 ‘깊은데서’ 하늘 보좌에로 그의 절박한 외침이 올라갔다. 그는 여호와께서 그의 외롭고 가냘픈 소리를 듣고 응답해 주시기를 간절히 구했다. 그 간구는 물론 응답되었다. 항상 그렇듯이! 간구자가 생각하기에 그의 고난은 모종의 죄와 다소간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사실일 수도 있고 사실이 아닐 수도 있었다. 그러나 어떻든 간에 자백 되지 않은 죄를 우리의 재난의 원인으로 여겨 제거한다는 것은 항상 바람직한 생각이다.

130:3~4
만일 여호와께서 세세한 내용을 기록하고 그 대가를 우리 각인이 치르게 한다는 그런 의미에서 “죄악을 감찰하신다면”, 상황은 매우 절망적일 것이다. 그러나 죄가 용서될 수 있는 길이 있음을 우리는 영원히 감사할 수 있다. 범죄한 죄인을 위한 용서가 있고, 범죄한 성도를 위한 용서가 있다. 첫째는 ‘법적인’ 용서, 즉 하나님의 재판장으로서의 용서가 있다. 그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얻어진다. 그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망라한다. 그것이 가능 함은 그리스도께서 갈보리에서 완성하신 사역 때문이다. 죽음을 통해서 그분은 우리의 모든 죄에 대한 형벌을 치르셨으며, 하나님은 그분의 모든 의로운 요구가 우리의 대속주에 의해 충족된 까닭에 자유롭게 우리를 용서하실 수 있다. 둘째는 ‘부모로서의’ 용서, 즉 하나님의 우리 아버지로서의 용서이다. 그것은 그분께 우리 죄를 자백함으로써 얻어진다. 그것은 하나님과, 그리고 그분의 가족과의 사귐의 회복을 가져온다. 그것 역시 십자가에 흘려진 예수님의 피로 우리를 위해 사신 바된 용서다. 그분의 용서의 한가지 결과는 그분이 사람들로부터 경외를 받으시는 것이다. 그분이 내 죄를 용서하기 위해 치르신 대가를 생각하고, 그분의 용서가 완전하고 값없고 영원하다는 것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그분을 영원토록 경외하고 신뢰하고 사랑하고 그리고 경배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130:5~6
시편 기자가 직접 용서를 구하지는 않았지만 3,4절에 확실이 그것이 암시되어 있다. 5절에서 여호와를 기다린다고 한 것은 용서를 기다린다는 뜻이 아니다. 용서는 그가 자백하는 순간 주어졌기 때문이다. 시편 기자가 기다리는 것은 용서가 아니라 여호와께서 그를 깊은 데서 구원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는 즉시 기도에 답하시지만 때로는 기다리도록 우리를 가르치신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하시네. 우리 마음이 연약할 때 그분은 그분의 자녀가 구하는 바로 그것을 주시네. 그러나 종종 믿음은 보다 깊은 안식을 배우고, 하나님이 말씀하지 않으실 때 그분의 침묵을 신뢰해야 하네. 그 이름이 사랑이신 그분이 가장 좋은 것을 주실 것이기 때문이네. 별들은 타버리고 산들은 사라질지라도 하나님은 진실하시고 그분의 약속은 그것을 구하는 자들에게 확실하네” (저자 미상). 이처럼 여기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를 기다리고, 그분의 말씀, 즉 듣고 응답하겠다는 그분의 약속을 바라는 법을 배웠다. 파수꾼이 동 트기를 기다리는 것 이상으로 그는 여호와께서 그의 어두움에 빛을 비추시는 것을 보기를 갈망했다. 그러나 5,6절은 놓쳐서는 안될 보다 넓은 의미가 있다.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강림하셔서 그분의 교회를 하늘로 옮겨 가시기를 고대하는 오늘날 신자의 간절한 바램을 표현해준다. 그 복스러운 소망은 좌절되지 않을 것이다.

130:7~8
이 시의 마지막 두 구절은 구원을 위한 기도가 응답된 후 시편 기자가 고백하는 간증으로 간주될 수 있다. 그 자신에 대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증거한 후에 그는 다른 이들도 그런 경험을 공유하기를 원했다. 어떤 사람이 뭔가를 진실로 믿을 때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하기를 원하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그처럼 이스라엘은 여호와를 바라라는 격려를 받았다. 그 이유는 세 가지가 주어졌다. 첫째로 그분의 인자하심이 변치 않는다. 둘째로 그분의 구속이 그 공급에 있어 풍성하다. 그리고 끝으로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구속하시려는 그분의 의지가 확고하다. 이 시는 깊은 슬픔에서 시작되어, 어떤 문제도 크게 여기지 않고 어떤 딜레마도 복잡하게 여기지 않으시는 하나님을 의지하라는 힘찬 호소로 마감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