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성경공부 시편 131-132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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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7월 01일 2021년본문
시편 131-132편 연구
131편: 슬기로운 겸손
인생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그 밑을 헤아릴 수 없는 신비들과 최고의 지성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기이한 상황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고난이란 문제에 대해 누가 최종적인 답을 말 하겠는가? 응답되지 않은 기도의 영역에 떠오르는 모든 의문들에 누가 답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누가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131:1
다윗은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체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하는 자의 마음처럼 높지 않았다. 그의 눈은 지적인 대가의 눈빛인양 높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했으며 “나는 모른다”라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을 알고 기이한 일은 하나님께 맡기는데 만족했다. 왜 자신이 알 수 없는 크고 심오한 일에 매달리겠는가? 그럴 필요 없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하나님의 처분에 맡겼다.
131:2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는 이러한 태도는 그의 영혼에 평안과 고요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엄마 품에서 고요 해진 젖뗀 아이 같았다. 처음에는 아이가 보채고 불안해하고 못 견뎌 할 것이다. 그러나 젖을 입에 물리면 갑작스레 조용해지고 엄마 품에서 안정을 찾는다. 우리도 감당하지 못할 일을 이해하느라 이 궁리 저 궁리 불안스레 마음 고생할 수가 있다. 그러나 답변할 수 없는 의문들을 하나님께 맡기자마자 우리 영혼은 긴장에서 풀려나게 된다.
131:3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그와 같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권했다. A. W. 토저는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비밀 되신 분 앞에 놀라움과 즐거운 침묵 속에 서서, ‘주 하나님이여, 당신은 아시옵니다’라고 속삭인다는 것은 크나큰 특권임을 잊지 말라.”
132편: 기도와 약속
이 시의 기자와 배경에 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한가지 가능한 견해는, 솔로몬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새로 지은 성전의 제 위치에 안치시킬 때 지어졌다는 것이다. 그 견해에 의하면, 1~10절은 여호와께서 쉐키나(영광의 구름)로 강림하여 궤위에 거하시기를 바라는 솔로몬의 기도이고, 11,12절은 하나님이 다윗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을 재확인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후반의 13~18절은 솔로몬의 구체적인 요청에 부응하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약속들을 담고 있다.
132:1~5
여호와께서 다윗이 당한 모든 고난을 그를 위하여 기억 해주시기를 구하는 서두의 간구는 평생에 그를 괴롭히던 일반적인 곤경을 가리키기보다는, 하나님의 지상 거처로서 성전을 짓기 위해 겪은 깊은 정신적 육체적 경험들을 가리킨다. 다음 세 구절에서 그 것이 설명된다. 성경 다른 데에 기록되지 않은 한 경우에, 다윗은 여호와를 위한 집, 즉 야곱의 전능자가 거하실 처소를 마련할 때까지는 그의 집에 들어가거나 그의 침상에 눕거나 혹은 잠을 자거나 하지 않겠노라고 여호와께 엄숙히 서원했다. 이 서원은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궤를 위한 영구한 처소를 세울 때까지는 만족스런 휴식을 취할 수 없다는 뜻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다윗이 전쟁의 사람인 까닭에 성전 건축을 허락 받지는 못했으나 솔로몬에게 건축에 필요한 자원을 준비해주는데 큰 기여를 한 것과 성전건축을 바라는 그 마음에 대해 하나님이 그에게 보상하신 일을 알고 있다.
132:6
본문은 기럇에 있는 궤의 위치에 대한 회상과, 그것을 예루살렘에 가져오려는 다윗의 사람들의 굳은 결심을 보여주는 듯하다. 6절은 궤를 에브라다(베들레헴)와 관련 짓는 듯 보기에 특히 해석이 어려우나, 그러나 궤가 그곳에 있었다는 기록은 일절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시도되어 왔다. (1) 왕과 그 신복들이 처음에 베들레헴에 있을 때 궤의 행방에 대해 들었으나 결국 야일, 즉 기럇여아림에서 그것을 찾았다. (2) 에브라다는 에브라임을 가리키며, 실로에 있던 궤의 안치소를 가리킬 수도 있다. (3)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이 아닌 갈렙 에브라다(대상 2:24)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갈렙 에브라다는 “숲의 성”을 뜻하는 기럇여아림의 야일(나무)과 동일하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6절의 두 문장은 같은 의미를 지닌 병행문장을 이루는 셈이다.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132:7
그 거룩한 궤를 예루살렘에 옮겨가면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발등상 아래 경배하기 위해 그분의 장막에 올라가는 것을 기뻐했다. 궤는 그 위를 덮은 영광의 구름에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른 까닭에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8절).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입고”(9절)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9절).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14절).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으로 입히리니”(16절). “그 성도들은 즐거움으로 외치리로다”(16절). 하나님의 발등상으로 여겨졌다.
132:8~10
이제 우리는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드리는 기도 소리를 듣는다(8~10절; 대하 6:41,42). 그는 하나님께 성소에 드셔서 궤의 상징성을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해달라고 구하고 있다. 또 한 그는 제사장들의 경건한 행렬과 백성들의 즐거운 외침과 왕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총을 위해 구했다. “주의 기름 받은 자”는 솔로몬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132:11~13
여호와는 우선 다윗 언약을 간략히 언급하심으로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 언약은 다윗에 관한한 무조건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영원한 보좌와 그 위에 영원히 앉을 후손을 약속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의 후손에 관한한 조건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순종에 달려있었다. 주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지만, 육체적으로 그분은 솔로몬의 후손이 아니라 다윗의 또 다른 아들인 나단의 후손이었다(눅 3:31).
132:14~18
이어서 솔로몬의 구체적인 요청에 대해 구체적인 응답이 주어졌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비교로 살펴볼 수 있다.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10절).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예비하였도다. …저에게는 면류관 이 빛나게 하리라”(17,18절) 사실 여호와는 솔로몬이 요구한 모든 것에 지나도록 풍성히 응답하셨다. 풍부한 식료품과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주겠다는 추가적인 약속이 있다(15절). 제사장들은 의로만이 아닌 구원으로 옷 입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16절). 성도들은 기쁨으로 외칠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16절). 원수들은 수치로 옷 입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18절). 17절의 의미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이 한 강력한 왕을 다윗에게서 나오게 하실 것이며(눅 1:69), 다윗, 즉 그분의 기름 받은 자를 위해 등불 혹은 아들을 예비하셨다는 것이다(왕상 15:4). 영구한 왕조에 대한 이 약속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수치로 덮일 것이나 그분의 머리는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워질 것이다. “전에 가시로 관 씌워졌던 머리에 이제 영광으로 관 씌워졌네! 하늘의 빛나는 왕관이 위대한 승리자의 이마에 둘렀네!” (토마스 켈리).
131편: 슬기로운 겸손
인생에는 설명할 수 없는 문제들이 있다. 그 밑을 헤아릴 수 없는 신비들과 최고의 지성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기이한 상황들이 있다. 예를 들어, 인간의 고난이란 문제에 대해 누가 최종적인 답을 말 하겠는가? 응답되지 않은 기도의 영역에 떠오르는 모든 의문들에 누가 답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택과 인간의 자유의지를 누가 조화시킬 수 있겠는가?
131:1
다윗은 모든 해답을 알고 있는 체하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모든 것을 아는 체하는 자의 마음처럼 높지 않았다. 그의 눈은 지적인 대가의 눈빛인양 높이 들리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한계를 인식했으며 “나는 모른다”라고 말하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알 수 있는 것을 알고 기이한 일은 하나님께 맡기는데 만족했다. 왜 자신이 알 수 없는 크고 심오한 일에 매달리겠는가? 그럴 필요 없다. 그는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은 하나님의 처분에 맡겼다.
131:2
하나님의 지혜와 사랑과 능력을 신뢰하는 이러한 태도는 그의 영혼에 평안과 고요함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엄마 품에서 고요 해진 젖뗀 아이 같았다. 처음에는 아이가 보채고 불안해하고 못 견뎌 할 것이다. 그러나 젖을 입에 물리면 갑작스레 조용해지고 엄마 품에서 안정을 찾는다. 우리도 감당하지 못할 일을 이해하느라 이 궁리 저 궁리 불안스레 마음 고생할 수가 있다. 그러나 답변할 수 없는 의문들을 하나님께 맡기자마자 우리 영혼은 긴장에서 풀려나게 된다.
131:3
시편 기자는 이스라엘 모든 백성에게 그와 같이 여호와를 신뢰하라고 권했다. A. W. 토저는 이렇게 말했다. “최고의 비밀 되신 분 앞에 놀라움과 즐거운 침묵 속에 서서, ‘주 하나님이여, 당신은 아시옵니다’라고 속삭인다는 것은 크나큰 특권임을 잊지 말라.”
132편: 기도와 약속
이 시의 기자와 배경에 관해서는 상당한 논란이 있다. 한가지 가능한 견해는, 솔로몬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새로 지은 성전의 제 위치에 안치시킬 때 지어졌다는 것이다. 그 견해에 의하면, 1~10절은 여호와께서 쉐키나(영광의 구름)로 강림하여 궤위에 거하시기를 바라는 솔로몬의 기도이고, 11,12절은 하나님이 다윗과 더불어 맺으신 언약을 재확인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후반의 13~18절은 솔로몬의 구체적인 요청에 부응하는 하나님의 구체적인 약속들을 담고 있다.
132:1~5
여호와께서 다윗이 당한 모든 고난을 그를 위하여 기억 해주시기를 구하는 서두의 간구는 평생에 그를 괴롭히던 일반적인 곤경을 가리키기보다는, 하나님의 지상 거처로서 성전을 짓기 위해 겪은 깊은 정신적 육체적 경험들을 가리킨다. 다음 세 구절에서 그 것이 설명된다. 성경 다른 데에 기록되지 않은 한 경우에, 다윗은 여호와를 위한 집, 즉 야곱의 전능자가 거하실 처소를 마련할 때까지는 그의 집에 들어가거나 그의 침상에 눕거나 혹은 잠을 자거나 하지 않겠노라고 여호와께 엄숙히 서원했다. 이 서원은 문자 그대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그것은 하나님의 궤를 위한 영구한 처소를 세울 때까지는 만족스런 휴식을 취할 수 없다는 뜻을 수사학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우리는 다윗이 전쟁의 사람인 까닭에 성전 건축을 허락 받지는 못했으나 솔로몬에게 건축에 필요한 자원을 준비해주는데 큰 기여를 한 것과 성전건축을 바라는 그 마음에 대해 하나님이 그에게 보상하신 일을 알고 있다.
132:6
본문은 기럇에 있는 궤의 위치에 대한 회상과, 그것을 예루살렘에 가져오려는 다윗의 사람들의 굳은 결심을 보여주는 듯하다. 6절은 궤를 에브라다(베들레헴)와 관련 짓는 듯 보기에 특히 해석이 어려우나, 그러나 궤가 그곳에 있었다는 기록은 일절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해석이 시도되어 왔다. (1) 왕과 그 신복들이 처음에 베들레헴에 있을 때 궤의 행방에 대해 들었으나 결국 야일, 즉 기럇여아림에서 그것을 찾았다. (2) 에브라다는 에브라임을 가리키며, 실로에 있던 궤의 안치소를 가리킬 수도 있다. (3) 에브라다는 베들레헴이 아닌 갈렙 에브라다(대상 2:24)를 의미할 수도 있다. 이 견해에 의하면 갈렙 에브라다는 “숲의 성”을 뜻하는 기럇여아림의 야일(나무)과 동일하다. 만일 이것이 사실이라면 6절의 두 문장은 같은 의미를 지닌 병행문장을 이루는 셈이다. “우리가 그것이 에브라다에 있다 함을 들었더니 나무 밭에서 찾았도다.”
132:7
그 거룩한 궤를 예루살렘에 옮겨가면서 백성들은 하나님의 발등상 아래 경배하기 위해 그분의 장막에 올라가는 것을 기뻐했다. 궤는 그 위를 덮은 영광의 구름에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른 까닭에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8절).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입고”(9절)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9절). “이는 나의 영원히 쉴 곳이라. 내가 여기 거할 것은 이를 원하였음이로다”(14절). “내가 그 제사장들에게 구원으로 입히리니”(16절). “그 성도들은 즐거움으로 외치리로다”(16절). 하나님의 발등상으로 여겨졌다.
132:8~10
이제 우리는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면서 드리는 기도 소리를 듣는다(8~10절; 대하 6:41,42). 그는 하나님께 성소에 드셔서 궤의 상징성을 실제적인 것이 되게 해달라고 구하고 있다. 또 한 그는 제사장들의 경건한 행렬과 백성들의 즐거운 외침과 왕에 대한 하나님의 지속적인 은총을 위해 구했다. “주의 기름 받은 자”는 솔로몬 자신을 가리키는 표현으로 이해할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132:11~13
여호와는 우선 다윗 언약을 간략히 언급하심으로 기도에 응답하셨다. 그 언약은 다윗에 관한한 무조건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그에게 영원한 보좌와 그 위에 영원히 앉을 후손을 약속해주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윗의 후손에 관한한 조건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그들의 순종에 달려있었다. 주 예수님은 다윗의 후손이지만, 육체적으로 그분은 솔로몬의 후손이 아니라 다윗의 또 다른 아들인 나단의 후손이었다(눅 3:31).
132:14~18
이어서 솔로몬의 구체적인 요청에 대해 구체적인 응답이 주어졌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비교로 살펴볼 수 있다. “주의 종 다윗을 위하여 주의 기름 받은 자의 얼굴을 물리치지 마옵소서”(10절). “내가 거기서 다윗에게 뿔이 나게 할 것이라. 내가 내 기름 받은 자를 위하여 등을 예비하였도다. …저에게는 면류관 이 빛나게 하리라”(17,18절) 사실 여호와는 솔로몬이 요구한 모든 것에 지나도록 풍성히 응답하셨다. 풍부한 식료품과 가난한 자에게 양식을 주겠다는 추가적인 약속이 있다(15절). 제사장들은 의로만이 아닌 구원으로 옷 입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16절). 성도들은 기쁨으로 외칠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16절). 원수들은 수치로 옷 입을 것이라는 약속이 있다(18절). 17절의 의미는, 예루살렘에서 하나님이 한 강력한 왕을 다윗에게서 나오게 하실 것이며(눅 1:69), 다윗, 즉 그분의 기름 받은 자를 위해 등불 혹은 아들을 예비하셨다는 것이다(왕상 15:4). 영구한 왕조에 대한 이 약속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다. 그리스도의 원수들은 수치로 덮일 것이나 그분의 머리는 영광과 존귀로 관 씌워질 것이다. “전에 가시로 관 씌워졌던 머리에 이제 영광으로 관 씌워졌네! 하늘의 빛나는 왕관이 위대한 승리자의 이마에 둘렀네!” (토마스 켈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