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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시편 137-138편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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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7월 06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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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137-138편 연구

 137편: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를 잊을진대!
 
1948편 4월, 예루살렘의 유대 지역은 사실상 포위상태에 있었다. 식량공급이 거의 바닥이 났다. 사람들은 1주일에 마가린 2온스, 감자 0.25파운드, 마른 고기 0.25파운드로 연명해갔다. 그 때 트럭 행렬이 식량을 싣고 텔아비브에서 오고 있다는 전갈이 왔다. 사람들이 앞을 다투어 수십 대의 트럭을 반겨 맞았다. 그들은 그 트럭행렬 맨 앞 광경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행렬 맨 앞의 푸른색 포드차의 앞 범퍼에 누군가 이렇게 써놓았다. “예루살렘이여, 내가 너를 잊을진대….” 이와 같이, 이 시편 137:5 말씀은 포로와 분산으로 점철된 격동의 역사를 거쳐오는 동안 유대 백성에게 용기를 북돋는 외침이 되어왔다.

137:1~3

바벨론 속박에서 풀려난 뒤에 기록된 이 시는 시온에서 쫓겨날 때의 고통을 회상한다. 아마도 안식일에, 자유로운 시간이 날 때마다, 그들은 기도하기 위해 바벨론 강변에 모였다. 옛 일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눈물이 흐르곤 했다. 그들은 시온을 기억했다. 그들에게 있어 그곳은 온 세상의 영적인 중심이요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다. 그들은 큰 성회로 모이는 동안 그곳에 즐거움과 희락이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그리고 이제 그들은 더 이상 예배하러 그곳에 올라갈 수 없었으며, 그 성소에는 할례받지 못한 이방인들의 부정한 손이 있었다. 바벨론 강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눈물과 고난의 강이 흐르고 있음을 마음에 그려보았다. 예레미야가 기도했던 것처럼 그러했다. “처녀 내 백성의 파멸을 인하여 내 눈에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애 3:48). “어찌하면 내 머리는 물이 되고 내 눈은 눈물 근원이 될꼬. 그렇게 되면 살육당한 딸 내 백성을 위하여 주야로 곡읍하리로다!”(렘 9:1)

137:2

그들은 버드나무에 그들의 수금을 걸었었다. 혹은 흔히 하는 말대로 그들은 선반에 수금을 걸었었다. 그런데 왜 수금을 타지 않았을까? 악기가 쓸모가 없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적어도 노래부를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부를 노래가 없다면 반주도 필요 없었다.

137:3

종종 바벨론 압제자들이 그들에게 히브리 노래를 불러보라고 요구했다. 소금으로 상처를 문지르는 듯 그들은 고통스럽게도 이렇게 요구했다. “고국에서 즐겨 부르던 노래를 하나 불러봐라!”

137:4

얼마나 모욕적인 요구인지! 유다인들은 응하지 않았다. 마음이 상해서만이 아니라, 그보다는 이방 우상숭배자의 땅에서 여호와의 노래를 부른다는 것이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예루살렘을 잊는 것과도 같았다. 그들은 여호와께 속한 것과 세상에 속한 것을 혼합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합당치 않다고 보았다. “이방인의 땅과 여호와의 노래는 결코 함께 발견될 수 없다”고 F. B. 메이어는 말했다.

137:5~6

이제 그 땅에 돌아온 까닭에 시편 기자는 예루살렘을 그들의 삶의 중심에 두려는 그의 백성의 단호한 의지를 표현한다. 우리는 여기서 예루살렘이 그곳에 거하는 여호와를 대표한다는 것을 기억하게 된다. 만일 그가 더 이상 시온에 대해 그러한 설명할 수 없는, 본능적인 애착을 갖지 않는 때가 온다면, 그 응당한 보응으로 그의 오른손이 생기를 잃고 다시는 수금 줄을 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 만일 예루살렘이 그의 마음에 첫 자리를 차지하지 않는 일이 생긴다면, 그의 혀가 입천장에 붙어서 다시는 그 아름다운 시온의 노래를 부를 수 없을 것이라고 그는 고백했다.

137:7

먼저 그 자신에게 그러한 조건적인 저주를 선언한 까닭에 그는 이어서 거룩한 성의 파멸에 일익을 담당한 자들을 거론하기가 한결 쉬웠다. 예를 들어, 에돔 자손을 보라. 그들은 일종의 박수부대를 이루어 그 성을 완전히 파하라고 침략자들을 부추겼다. “훼파하라. 훼파하라. 그 기초까지 훼파하라!”고 그들은 외쳤다. 여호와여, 그 성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만족히 여기는 그들의 사악함을 기억하소서!

137:8

이어서 잔인한 파괴자인 바벨론이 있었다. 그 민족은 비록 그분의 백성을 징벌하기 위한 하나님의 손의 도구이긴 했으나 하나님은 바벨론인의 무자비한 살육을 용서치 않으셨다. “내가 내 백성을 노함으로 내 기업을 욕되게 하여 그들을 네 손에 붙였거늘 네가 그들을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고 늙은이에게 네 멍에를 심히 무겁게 메우며”(사 47:6). “나는 조금만 노하였거늘 그들은 힘을 내어 고난을 더하였음이라”(슥 1:15). 바벨론의 멸망에 대해 시편 기자는 마음에 조금도 의문이 없었다. 그것은 선지자들이 예언한 바였다(사 13:1~22; 렘 50:15,28; 51:6, 36). 바벨론을 파멸시킨 자들은 그분의 심판의 도구로 하나님께 쓰임받은 것을 만족히 여길 것이다.

137:9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극히 난해하다. “네 어린것들을 반석에 메어치는 자는 유복하리로다!” 신약성경의 비폭력적인 가르침으로 양육받은 자들에게는 매우 가혹하고 보복적이고 무정한 처사로 여겨질 것이다. 왜 아무 죄없고 힘없는 아이들이 그토록 비인간적으로 취급되어야 하는가?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다음 사실들을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로, 우리는 이 구절이 축자적으로 완전히 영감된 하나님의 말씀의 일부라는 전제하에 출발해야 한다. 따라서 모든 문제는 말씀 자체가 아닌 우리의 이해에 달려있다. 둘째로, 바벨론의 어린 것들의 멸망은 이사야에 의해 분명히 예언되었다. “그들의 어린아이들은 그 목전에 메어침을 입겠고 그 집은 노략을 당하겠고 그 아내는 욕을 당하리라”(사 13:16). 따라서 시편 기자는 하나님이 이미 예언하신 것(하나님의 선고를 집행하는 자들이 유복하다는 부분을 제외하고)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아울러 우리는 죄 없는 아이들이 종종 그들의 부모의 죄의 결과를 당한 사실을 알고 있다(출 20:5; 34:7; 민 14:18; 신 5:9). 아무도 홀로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의 행동은 선악 간에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친다. 죄의 고통스런 결과 중 한가지는, 그 비극적인 보응에 다른 이들이 연루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저주의 내용을 대할 때는, 모세 율법 아래 사는 사람에게 적합한 행동과 태도가 은혜 아래 사는 그리스도인에게 반드시 적합 하지는 않다는 사실을 늘 염두에 두어야 한다. 주 예수님은 산상수훈에서 그 사실을 누누이 밝히셨다(마 5:21~48). 당신이 이 구절을 어떻게 해석하든 간에 그 영적인 적용은 분명하다. 우리는 우리의 삶의 작은 죄들을 단호히 처리해야 한다. 작은 죄들이 멸절 되든가 아니면 그것들이 우리를 멸하든가 둘 중 하나이다. C. S. 루이스는 이점과 관련하여 이렇게 말한다. “나는 내면세계에는 어린 아기와 같은 것들이 있음을 안다. 장차 만성적인 음주벽이나 뿌리깊은 증오심으로 발전할 수 있는, 그러나 여러 가지로 우리를 달래고 설득하는, 그리고 아주 미미하고 힘없어 보이기에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잔인한 처사로 느껴지는 그러한 작은 방종과 작은 분노 따위의 희미한 시작이 있다. ‘나는 많은 것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야. 다만…’ 혹은 ‘나는 적어도…하기를 바랬는 데…’ 혹은 ‘조금만 생각해봐’ 등등의 속삭임으로 그것들은 우리에게 다가온다. 그 모든 예쁘장한 아이들(아이들은 그렇게 애교스럽게 다가온다)을 대할 때는 이 시의 조언이 최선이다. 어린 것들을 메어 치라. 그리고 그렇게 하는 자는 ‘복이 있다.’ 말은 쉽지만 행동에 옮 기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138편: 하나님의 신실하신 말씀

다윗은 모종의 중요한 기도 응답에 대해 크게 감사했다. 이러한 감사의 표현을 통해 그는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에 대한 합당한 본을 남겨주었다. 의문의 여지없이 이 시는 이스라엘이 예수님, 곧 메시야의 지배 아래 마침내 회복될 때 그 완전한 적용을 볼 것이다.

138:1

다윗의 감사에는 주저함이 일절 없다. 여호와를 송축하는 데 그의 모든 능력이 동원되었다. 그리고 그의 예배에는 소극적이거나 은밀한 부분이 일절 없다. 그는 신들 앞에서, 즉 세상 열왕 앞에서 부끄럼 없이 노래했다. 여기에 나오는 ‘신들’은 천사나 우상을 의미할 수도 있으나 문맥상 주변 통치자로 그 의미가 제한되는 듯하다.

138:2

경건한 유대인의 관례대로 다윗은 예배드릴 때에 성막을 향해 경배를 했다(아직 성전이 지어지지 않았다). 그는 그분의 한 결같은 사랑과 신실하심으로 인해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했다. 그분의 사랑이 그분으로 하여금 우리에게 “그의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 속”을 주게 했으며, 그분의 신실하심이 그 모든 약속이 이뤄질 것을 확실히 보장한다. “이는 주께서 주의 말씀을 주의 모든 이름 위에 높게하셨음이라.” 문맥은 그분의 말씀을 지키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관계가 있으며, 그 의미는, 그분이 말씀하신 바를 행하셨을 뿐 아니라 그 이상으로 많은 것을 행하셨다는 뜻인 듯하다. 아울러 “다윗에게 주신 약속을 풍성히 이루시는데 있어서 하나님은 그 자신에 대한 이전의 모든 계시를 뛰어넘으셨다”는 뜻이 담겨있을 수도 있다. 만일 이 구절을 성육신하신 말씀에 적용한다면, 당연히 그것은, 하나님이 그 자신에 대한 다른 모든 나타남 위에 주 예수님을 높이셨다는 의미이다.

138:3

3절은 시편 기자가 찬양을 토로한 직접적인 배경을 밝혀준다. 절박한 순간에 그는 여호와께 부르짖었으며 그 응답이 즉시 왔다. 엄청난 힘이 그의 영혼에 부어져 두려움을 내어쫓고 위험에 직면하도록 용기를 북돋웠다.

138:4~6

다윗의 기도에 응답하신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세상 열왕에게 능력있는 증거가 되었다. 그들은 하나님이 무엇을 약속하셨는지를 알았으며, 이제 그 예언이 어떻게 이뤄졌는지를 보았다. 이에 그들은 여호와의 영광이 참으로 위대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들은 하나님이 비록 초월적인 존재지만 다윗 같은 낮은 자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시고 다윗의 대적 같은 교만한 자를 감찰하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38:7

다윗은 모든 종류의 대적과 모든 종류의 위험과 모든 종류의 고난에 에워싸였지만 여호와께서는 다윗으로 하여금 마치 대적들이 존재하지 않듯이 그들 사이로 안전하게 지나가게 하셨다. 그의 대적을 친 그 손이 그를 재난에서 구원할 것이다.

138:8

정당한 확신을 가지고 다윗은 “여호와께서 내게 관계된 것을 완전케 하실지라”고 확언한다. 동일한 확신으로 바울은 빌립보서 1:6에서 이렇게 표현했다. “너희 속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 “그분의 선하심이 시작한 일을 그분의 능력의 팔이 완성할 것이라. 그분의 약속은 예와 아멘이요 이제껏 헛된 것 없네. 장래 일이나 현재 일이나 땅 아랫것이나 땅 위엣 것이나 그분으로 그 목적을 보류하게 하지 못하며 우리 영혼을 그분의 사랑에서 끊지 못하네.” (아구스투스 M. 토플레디) 그렇다. 그분의 한결같은 사랑은 영원히 지속되며, 비록 우리가 다윗과 더불어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을 버리지 마옵소서”라고 기도할 수 있지만, 사실 그분은 결코 우리를 버리실 수도, 버릴 마음도 없으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