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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매일성경연구 욥기 41-42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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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3월 31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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욥기 41-42장 연구

(3) 악어를 생각해 보라(41장)

하나님은 욥의 원망에 직접 답하지 않으셨다. 그 대신 그분은 사실상 이렇게 말씀하고 계셨다. “너는 마땅히 참으로 위대하고 위엄 있고 영광스런 분의 지혜와 사랑과 능력을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41:1~9
또 하나의 거대한 양서류는 하나님의 피조물 중 독특한 리바이어탄이다. 욥이 그것을 다룰 수 있을까? 하나님은 그것을 알고자 하셨다. “그것을 한번 건드려 보라. 다시는 건드리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과 싸운 일을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8절, TEV). 고대 가나안 문학에서 리바이어탄이란 용어는 ‘머리가 일곱  (40:15~24) 예를 들어, 바네스는 본문을 하마에 맞추기 위해 다음과 같은 묘사를 동원했다. “부리부리한 눈과 널찍한 콧등, 독특하게 머리에 붙은 턱을 갖춘 이 동물의 큰 머리는 그 모양이 기괴하다. 그 턱을 벌리니 분홍색의 살이 퉁퉁 찐, 그리고 섬찟한 모양의 엄니로 무장한 어마어마하게 큰 입과 혀가 특히 놀랍다”(“Job,” 2: 247,248). 이 표현이 지니는 문제는, 바네스의 하마에 대한 묘사는 훌륭하지만, 엄니나 살이 퉁퉁 찐 분홍색 입 등은 욥기에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베히모쓰의 턱과 머리나 콧등도 성경에 묘사되이 있지 않다(40장). 흔히 이 짐승은 나일강의 악어로 추측되며, 그에 관한 여러 묘사들을 보면 그 파충류에 잘 어울린다. 베히모쓰가 주로 땅에 거하는 반면, 리바이어탄은 주로 물에 거한다. 인간은 갈고리와 줄로 그것을 잡을 수 없다. 그것을 집에서 기르거나 애완용으로 삼을 수도 없다. 연회의 장식으로 삼을 수도 없다. 그 갑옷 같은 가죽은 창이나 작살을 거부하며, 그것을 보기만 해도 낙담이 되어 건드릴 엄두를 내지 못한다.

41:10~11
하나님은 묘사를 중단하고 관련된 질문을 던지셨다. 사람들이 일개 짐승을 그렇게 두려워할진대 그 짐승을 지으신, 영원하고, 아무에게도 구속받지 않고, 만물의 주인이자 창조주이신 그분은 얼마나 더욱 두려워해야 하는가? 클라인은 이렇게 설명한다. “본문의 요점이 여기에 밝혀져 있다. 욥은 같은 피조물조차 제어 할 수 없는 자신의 무능력을 통해서 창조주의 보좌에 오르려는 시도의 어리석음을 깨달아야 했다.”

41:12~34
리바이어탄으로 돌아가 보자. 그 몸집은 육중하고 그  힘은 대단하다. 그 등은 거친 보호막이다. 그것은 굴레를 씌울 수 없다. 그 입과 이빨은 압축기와 같다. 그 가죽과 비닐은 쇠붙이로 덮은 갑옷과 흡사하다. 시적인 표현을 통해 여호와께서는 뭔가 그것을 건드릴 때 그 반응으로 재채기하는 모습과, 눈과 입과 콧구멍 이 움직이는 모습을 두렵게 묘사하셨다. 리바이어탄의 힘은 가공할 만하며 그 몸은 단단하다. 그것은 아무 두려움이 없으며, 주위를 휘 저으면서 강한 자들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며, 일상적인 무기들은 그 등에 부딪치면 튕길 뿐이다. 그것이 진흙을 기어갈 때면 배에 날카로운 유리조각이 붙었듯이 움푹 패인 자국이 남는다. 그것이 물을 헤쳐갈 때면 솥의 물이 끓듯이 물결이 요동하며 흰 거품을 낸다. 아무리 동양적인 과장법을 감안한다해도, 악어는 아무리 크다 해도 ‘모든 교만한 것의 왕’으로 불릴 만하지 못하다.‘ 여기에 언급된 들짐승과 아마도 공룡에 대한 묘사는 하나님 자신의 영광과 능력과 위엄을 나타내 준다. 그것들은 그분의 피조물이며, 그분은 의도적으로 그것들을 사용하여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묘사하셨다. 따라서, 그분이 사슴과 까마귀 같은 무해한 짐승에서 시작해서 점차 규모가 커져서 짐승 중 가장 큰 땅의 베히모쓰와, 짐승의 왕인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두려운 바다의 리바이어탄까지 묘사하신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4) 욥의 겸손한 반응(42:1~6)

42:1~6
욥은 압도당했다. 이제 충분했다! 그는 하나님의 주재권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이 스스로 알 수 없는 말을 했다고 시인했다.  리바이어탄은 바다에 사는 공룡이었을 수도 있다. 네 개의 큰 날개(다리, 혹은 물갈퀴-역주)와 아주 긴 목을 갖춘 파충류에 대한 이 묘사는 거대한 바다 생물로서 소멸된 것으로 믿어지는 파충류인 ‘장경룡’(plesiosaurus, 長頸龍)이었을 수도 있다. 욥기 41장의 묘사는 이 생물이나 그와 유사한 바다 공룡과 일치한다. 유명한 ‘네스호 괴물’에 대한 묘사도 ‘장경룡’과 일치한다. 이제 그는 여호와에 대해 들을 뿐 아니라 그 눈으로 직접 뵈었으므로 스스로를 원망하고 티끌과 재 가운데서 회개했다. 물론 그는 하나님을 실제로 본 것이 아니라, 그분의 지혜와 권능과 섭리와 주권에 대한 생생한 계시를 받았기에 위대하신 하나님을 뵌 것과 다 름없었던 것이다. 욥기 1:1에서 욥은 ‘흠이 없다’고 불리었다. 그런데 여기 욥기 마지막에서 그는 자신을 원망했다. 이것은 여러 세대 동안 하나님의 성도 중 뛰어난 자들이 경험해온 바이다. 은혜 안에서 성장하면 할수록 “자기가 보기에는 미천해진다”라고 D. L. 무디는 표현했다.

5. 결언:

욥의 승리

1) 욥의 친구들이 책망 받고 회복됨(42:7~9)

42:7~9
여호와께서는 이어서 그분을 잘못 제시한데 대해 엘리바스와 그의 두 친구들을 책망하셨다.  그들은 모든 고난이 죄의 징벌이라고 주장해왔다. 그것은 욥의 경우에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여 큰 번제(일곱 수송아지와 일곱 수양)를 드렸다. 욥은 친구들을 위해 기도함으로 중재자 역할을 했으며, 그 결과 그들에 대한 심판이 철회되고 욥은 기쁘게 받으신 바 되었다.

2) 욥의 번성이 회복됨(42:10~17)

42:10~12
욥이 친구들을 위해 기도하자 여호와께서는 욥이 전 에 당한 손실을 갑절로 회복시키시되 순서를 뒤바꾸어 양과 약대와 소와 암나귀의 순으로 회복시키셨다.

42:13~17
욥은 또한 일곱 아들과 세 딸을 얻었는데, 이전의 자 녀들이 아마도 천국에 있었을 것이기에 식구가 두 배로 늘어난 셈 이었다. 욥은 140년을 더 생존했다. 여호와께서 욥의 말년을 처음보다 더 축복하셨다. 그래서 욥은 나이 늙고 기운이 차서 죽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에서 욥은 사단이 지적했듯이 하나님을 저주하지 않았다. 몸의 질병으로 흉측스럽게 일그러진 욥이 회복된 후에 아리땁기 그지없는 딸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의 손길이 아닐 수 없다(아버지들은 어여쁜 딸을 얼마나 자랑하는지!). 그들의 이름이 교 훈적인데, 여미마는 ‘비둘기’를, 긋시아는 ‘향기로운 계수나무 껍 질’을, 그리고 게렌합북은 ‘눈썹 화장’을 각각 뜻한다. 욥은 또한 그들에게 오라비와 함께 기업을 주었는데 이는 아마도 족장시대에는 일반적인 관습이 아니었을 것이다. 리도우트는 그 이름들이 영적인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것들은 욥의 시련의 열매이다. 비둘기는 슬픔의 새의 부드러움과 사랑을 말해준다. 계수나무는 욥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향기를 말해준다. 그리고 화장품은 욥의 고난의 결과의 아름다움을 말해준다. 사랑, 향기, 아름다움, 이들은 우리의 슬픔에서 생겨난다. 그것들처럼 아리따운 딸들은 없다” 고대 여성들은 입술보다 눈 화장을 강조했다. 이 모든 것은 “해 아래는 새 것이 없다”고 한 솔로몬의 고백을 예시해준다!

6. 결론:
욥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들 사실 인간의 고난의 신비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았다. 웨슬리 베이커의 표현을 보자. “욥기의 종착점에 이르러서도 해답은 기록된바 없다. 논리적인 이성을 만족시킬 것이 없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두 가지 사실을 확신할 수 있다. 첫째로, 욥의 고난은 그의 개인적인 죄의 직접적인 결과가 아니었다. 하나님은 그가 순전하고 정직하다고 증거하셨다(1:8). 또한 하나님은 욥의 세 친구들의, 하나님이 그의 죄 때문에 그를 징벌하 신다는 생각이 옳지 않다고 지적하셨다(42:8).

둘째로, 비록 욥이 자신이 범죄한 까닭에 징벌 받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의 시련이 그 마음에 도사린 교만과 자기정당화와 적의감을 드러내주었다. 그는 자기 자신의 무가치함과 하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계시를 받고(42:1~6) 친구들을 위해 기도한(42:10) 연후에야 비로소 회복되었다. 욥기를 통해 우리가 고난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교훈들은 이러하다.

(1) 의인도 고난에서 면제되지 않는다.
(2) 고난이 반드시 죄의 결과는 아니다.
(3) 하나님은 의인을 보호막으로 두르신다.
(4) 하나님은 질병이나 고난을 보내지 않으신다. 그것은 사단으 로부터 온 것이다(눅 13:6; 고후 12:7). (5) 사단은 악인(스바 사람과 갈대아 사람)과, 초자연적인 재난 (하늘의 불)과, 날씨(대풍)와, 질병(욥의 악창)과 죽음 등의 영역을 어느 정도 다스린다.  (6) 사단은 하나님이 허락하실 때만 신자에게 그러한 재앙을 임 하게 할 수 있다.
(7) 하나님이 허락하시는 것에 대해 종종 이렇게 고백될 수 있어 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께 복을 받았은즉 재앙도 받지 아니하겠느뇨?”
(8) 우리는 주어진 상황을 사단이 아닌 여호와께로부터, 그분의 허락 아래 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주신 자도 여호와시요 취하신 자도 여호와시오니.”
(9) 하나님은 우리가 고난당하는 이유를 항상 설명해주시지는 않는다.
(10) 고난은 인내를 갖게 한다.
(11) 고난 중에 있는 성도를 찾아갈 때 우리는 판단하는 자세를 취해서는 안 된다.
(12) 그들을 방문하는 시간은 짧아야 한다.
(13) 인간의 생각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직 하나님만이 온전히 위로할 수 있으시다.
(14) 욥기 끝에서 우리는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이심을 본다(약 5:11). 또한 우리는 때로 잘못은 적어도 이생에서 바로잡아진다는 것을 배운다.
(15) 욥의 고난 중의 인내는 하나님의 입장을 변호해주었다.
(16) 욥의 인내는 사단이 거짓 고소자요 거짓말쟁이임을 증명해 주었다.
(17) “인간은 그를 둘러싼 것들보다 위대하며, 그의 소유에나 가족에게 어떤 일이 임하든 하나님은 예전처럼 진실로 찬양과 신뢰를 받기에 합당하시다.”
(18) 우리는 예외를 허락지 않는 일방적인 말을 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9) 사단은 편재하지도, 전지 전능하지도 않다. (20) 하나님은 뜻하지 않은 고난을 허락하시는 중에도 여전히 의롭고 선하시다.

성경의 다른 곳으로부터 우리는 하나님이 성도들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에 대해 추가적인 비췸을 얻을 수 있다.

(1) 때로 고난은 삶 속의 판단 받지 않은 죄의 결과이다(고전 11: 32).
(2) 고난은 인내, 오래 참음, 겸손 등의 영적인 은혜들을 개발시키는 하나님의 도구이다(롬 5:3,4; 요 15:2).
(3) 고난은 주님께서 자신의 형상이 보다 온전히 반영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신자의 삶에서 불순물이나 불결함을 제거해준다(사 1:25).
(4) 고난은 하나님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이 자기를 위로하신 동일한 형태의 위로로 다른 사람을 위로할 수 있게 해준다(고후 1: 4).
(5) 고난은 성도로 하여금 구주의 대속의 고난이 아닌 고난에 동참하게하여 그분께 더 많은 감사가 있게 한다(빌 3:10).
(6) 고난은 하늘과 땅에 있는 존재들에게 실물 교훈이 된다(살후 1:4~6). 그것은 하나님이 다만 그 베푸시는 은총 때문이 아니라 그 분 자신 때문에 사랑을 받으실 수 있음을 보여준다.
(7) 고난은 아들 됨의 보증인데, 이는 하나님은 그 사랑하시는 자들을 징계하시기 때문이다(히 12:7~11).
(8) 고난은 성도들로 자기 자신의 능력이 아닌 하나님만을 의뢰 하게 한다(고후 1:9).
(9) 고난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하나님 자신에게 가까이 가게 한다(시 119:67).
(10) 고난은 장래 영광을 약속해 준다(롬 8:17,18). (11) 하나님은 우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결코 허락지 않으신다(고전 10:13).
“…너희가 욥의 인내를 들었고 주께서 주신 결말을 보았거니와 주는 가장 자비하시고 긍휼히 여기는 자시니이다”(약 5: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