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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공부 매일성경연구 시편41-42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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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04월 29일 202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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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41-42편 연구

 41편 : 병상(病床)의 기도
 
41:1~3

그러나 병상에 누운 자는 아무 위로가 없지 않았다. 먼저 그는 여호와께서 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를 축복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했다. 여기서 ‘빈약한 자’는 경제적으로 가난한 자가 아니라 질병으로 건강이 약한 자를 의미하는 듯하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고통 중에 있는 자들에게 행하신 그 일을 자신이 행했다(질병 중에 있는 모든 자를 돕고 위로하고 기쁘게 해주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제 그는 여호와께서 환란 때에 그를 건지신다는 약속을 주장했다.

41:4
그러나 시편 기자는 자신이 과거에 병들고 약한 자를 돌아 본 일만 의존하지 않았다. 그는 지혜롭게도 기도로 자신의 질병을 여호와께 가져가서 자신의 죄를 자백하고 병 고침을 호소하되 자신이 받을 자격이 없는 것을 요구하듯 호소했다. 모든 질병이 신자의 삶의 죄의 직접적인 결과는 아니다. 예를 들어 나이든 사람들의 질병 중 많은 것이 노화로 인한 정상적인 쇠퇴과정의 일부이다. 그러나 때로는 죄와 질병이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경우가 있는데, 그럴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경우에는 여호와의 존전에 급히 나아가 진실되게 자복해야 한다. 그 모든 경우에는 위대한 의사의 용서가 이 세상 의사의 처방보다 선행되어야 한다.

41:5
그 어간에 시편 기자의 원수들은 다윗이 죽었다는 전갈이 오기만을 고대하고 있었다. “그가 언제나 죽지? 언제나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지?”라고 그들은 서로 물었다.

41:6
이따금씩 그 악인 중 하나가 문병시간에 찾아왔지만 그는 위로의 말이나 희망과 격려의 말이 전혀 없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다윗을 비방하는데 이용할 정보를 찾는 듯했다. 그는 그곳을 떠난 후 상상 가능한 모든 부정적인 소문을 퍼뜨렸다

41:7~8
병든 자에 대한 좋지 않은 소문이 계속 퍼졌으며, 악한 자들은 다윗에게 재앙이 임했다고 미리 짐작했다. 그들은 그가 치명적인 병에 걸렸으며 곧 죽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41:9
아마도 ‘가장 비극적인 일’은 절친한 친구였던 자의 배신이었다. 삶의 모든 슬픔 가운데 이것(당신과 가까이 사귀던 자에게 배신당하는 것)은 분명 가장 고통스런 일 가운데 하나이다. 그것은 유다의 배신에서 구주께서 경험하신 슬픔이며, 또한 그 대장을 쫒는 자들의 삶에 종종 일어나는 경험이다.

41:10
다윗은 말하자면 그를 등뒤에서 찌른 자를 떠나 여호와께로 나아가 자비를 구했다. 사람들이 그에게 등을 돌리고 있었을 때 그는 여호와를 신실히 의지했다. 그리고 “나를 일으키사 나로 저희에게 보복하게 하소서”라는 좀 이해하기 힘든 요청을했다. 언뜻 보기에는 다윗과 같은 인품의 소유자에게 어울리지 않는 듯 보이지만, 우리는 그가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이스라엘의 통치자였다는 점과, 그리고 소요와 반역을 치리하는 것이 왕으로서의 그의 의무 였다는 점을 기억해야 한다.

41:11~12
다윗은 그의 대적들의 음모가 좌절되는 것을 통해 여호와께서 그에게 은총을 베푸시는 모습을 보고는 이렇게 고백했다. “주께서 나를 완전한(정직한) 중에 붙드시고 영영히 주의 앞에 세우시나이다.” 위의 번역에 의하면, 다윗이 지나치게 자기 자랑을 하는 듯 여겨 질 수 있다. 그러나 그는 사실 죄와 실패에도 불구하고 정직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의 대적에 비하면 그는 미덕의 표본이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삶에서 정직과 의로움을 보시고 그를 붙드신 것은 극 히 당연한 일이었다.

41:13
확신과 평온 가운데 이제 시편 기자는 마지막 찬양과 함께 그 목소리를 높였다. 여호와, 언약을 지키시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영원부터 영원까지 경배 받기에 합당하시다. 다윗은 그 찬미에 두 번의 아멘을 덧붙였으며, 우리도 그렇게 할 수 있다!

제2권(42~72편)

42편 :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

42:1
하나님과의 사귐을 바라는 우리의 내적인 갈망은 가슴을 헐떡이며 가쁜 숨을 몰아쉬며 시냇물을 찾아 메마른 들판을 헤매는 사슴의 애절한 열망에 비유할 수 있다.

42:2
우리의 갈증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다른 어떤 것도 그 갈증을 채울 수 없다. 그리고 그것은 죽은 우상이 아닌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것이다. 그것은 여호와 앞에 개인적으로 나아가고 그분의 얼굴을 바라봄으로써만 온전히 만족되는 갈망이다.

42:3
여호와에게서 분리되는 그 고통을 누가 묘사하겠는가? 그 것은 그치지 않는 눈물을 식물 삼는 것이요, 감소되지 않는 불행의 삶이다. 그것으로도 족하지 않는 듯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뇨?”라는 대적의 조롱소리가 슬픔을 가중시킨다. 시므이가 다윗에게 이렇게 말한 것이 바로 그런 의미가 있었다. “…보라 너는 피를 흘린 자인고로 화를 자취하였느니라!”(삼하 16:8).

42:4
물론 좋은 시절에 대한 기억도 있다. 하나님과 끊어지지 않는 사귐 가운데 행하던 때가 얼마나 놀라웠던가를 기억할 때 그러한 사귐이 없다는 것이 견딜 수 없었다.

42:5
행복했던 지난날에 대한 생각은 영적인 낙심으로 이끌며 비관과 믿음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갈등을 일으킨다. 영혼은 좌절되고 불안해하지만, 그러나 믿음은 그러한 무거운 마음 상태에 도전을 촉구한다. “너는 하나님을 바라라. 그 얼굴의 도우심을 인하여 내가 오히려 찬송하리로다.”

42:6
낙심은 다람쥐 쳇바퀴 돌듯 되풀이된다. 그러나 믿음이 요단 땅과 헤르몬과 미살 산에서 하나님을 기억하리라는 확신에 찬 주장으로 되받아 친다. 아마 이 세 장소는 세 가지 영적인 경험을 상징할지 모른다. 그에 대해서는 확실히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해 보이는 것은, 그것들이 예루살렘의 하나님의 전에서 멀리 떨어진 외지(the land of exile)를 대표한다는 점이다.

42:7
이 7절을 대할 때, 우리의 영적인 본능은 우리가 아주 특별한 방법으로 갈보리에 이르러 하나님의 심판의 파도와 물결이 엄몰할 때 주 예수께서 부르짖으시는 소리를 듣고 있음을 말해준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그 몸에 짊어지셨을 때 하나님의 진노의 폭포가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그분 위에 내리쳤다.

42:8 그러나 죠지 뮬러의 말대로 “믿음은 시련을 먹고 자란다.” 따라서 우리는 확신에 찬 신자가 이렇게 확언하는 것을 듣는다. “낮에는 여호와께서 그 인자함을 베푸시고 밤에는 그 찬송이 내게 있어 생명의 하나님께 기도하리로다.” 이것이 3절의 ‘밤낮’에 대한 답변이다. 거기서 시편 기자는 “내 눈 물이 주야로 내 음식이 되었도다”라고 고백했었다. 그러나 이제 낮은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으로 충만하고, 밤은 찬송과 기도로 충만하다.

42:9~10
다시 한번, 이번에는 대적의 집요한 압박으로 인해 낙심이 찾아온다. 하나님이 그 자녀를 잊으신 듯하다. 홀로 버림받은 신자는 애곡하는 자처럼 방황한다. 그는 “마음을 찌르는 날카로운 소리로 대적이 나를 비방한다”(Gelineau)라고 말한다. 외면적으로 볼 때는 하나님이 그 자녀를 버리신 듯했다. 그래서 대적이 “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는 질문으로 끊임없이 그를 괴롭힌다.

42:11

그러나 믿음은 항상 마지막 결론을 가지고 있다. 낙심하지 말라. 불안해하지 말라. 하나님을 바라라. 너는 대적과 압제에서 건짐 받을 것이다. 그리고 너는 다시 한번 하나님을 네 구주와 네 하나님으로 찬양하게 될 것이다. 어떤 이는 이렇게 표현했다. “처방은, 낙심에 도전하고, 위를 바라보고, 소망을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깨어 경성하고, 위를 향해 달려가고, 분주히 움직이고, 경주를 달리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팔짱을 끼고 패배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